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客記
<민중의 적>,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연출, 샤우뷔네 베를린 제작, LG아트센터, 2016. 본문
기자들이 기사 쓰기 좋을 작품이다. 제4의 벽 따위야 무너진 지 오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무대와 객석이 토론을 펼치는 연극이라니. 이 뭔가 새롭고 흥미진진한 구도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는 것보다 기사를 통해 재현된 모습을 읽고 있는 편이 더 행복하다. 관련 기사에 따르면, 첫날 공연의 토론 시간에선 그나마 사대강, 옥시와 같이 현재 우리 사회의 현안들이 언급되었다(한겨레). 하지만 그것을 "열띤 토론"이었다고 기록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첫날 공연을 관람한 관객들이 SNS에 남긴 증언에 따르면, 중요한 키워드가 나왔을 뿐이지 토론의 수준이 결코 높았던 건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도 트위터에 남긴 관객들의 글을 살펴보면 이 독일 연극은 꽤 만족스러웠던 것 같고, 앞으로도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좋았던 기억은 공유해도 그렇지 않았던 기억은 기록하지 않는 우리의 습성이 반영된 결과이다. 비교적 비판적 입장을 가진 한 트윗을 소개한다. (사족으로, 트위터에선 LG 아트센터가 어느덧 엘아센으로 불리고 있었다. )
유감스럽게도 내가 본 27일 공연의 토론 시간은 참담했다. 이 날 토론에서는 전날과 달리 섹시한 키워드는 나오지 못했고, 다수가 옳으냐 소수가 옳으냐를 놓고 이야기 하는 데 시간을 다 써버렸다. 객석에서 나치가 언급되었으나, 통역사는 관객들의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고, 배우는 그저 곤란해 했다. 차마 토론이라 말하기 민망한 대화가 진행되고 말았다.물론 메시지 분명하고 서사구조 괜찮고 퍼포먼스 적당히 흥미롭긴 했는데 정녕 이게 베스트인가? 외국 공연 국내에 따올 만큼의 신선한 공연인가 하는 점엔 의문 부호.(그리고 반전이 너무 짐작되잖아. 민중의 적이란 제목부터도 함의가 너무 미리 보이는 것)— jung (@litelife1) 2016년 5월 27일
이 프로덕션이 처음 시작할 무렵 베를린에 있었던 덕분에 나는 이 작품을 샤우뷔네에서 오픈 리허설로 볼 수 있었다. 그날 나보다 너댓 줄 앞에 앉아서 관객들의 토론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오스터마이어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독일 관객들도 상당히 열심히 토론에 참여 했었다. 그날 나는 그들이 무슨 얘기를 주고 받았는지 거의 알아듣지 못했고, 한국 관객들이라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이번에 LG아트센터가 그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당초 나의 예상 보다 관객들의 참여는 활발했다. 하지만 결코 수준 높은 토론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건 관객들의 잘못이 아니라 연출 탓, 혹은 연출의 의도적 선택으로 보인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주인공 슈토크만 박사에게 감정이입할 수밖에 없는데, 정작 토론은 박사가 무지한 대중을 비난하고 나선 시점, 즉 민중의 적은 바로 민중 너네들이라는 데서 시작된다. 상황 파악이 충분히 되지 않은 상태에서 관객들은 일단 슈토크만 박사의 편을 들게 된다. (대다수가 슈토크만을 지지한다고 손을 들었다.) 보다 큰 문제는 토론이 어떻게 얼마나 진행될지 관객들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토론이 대충 얼마나 진행될지 알고, 발언의 기회가 얼마나 주어져야 하는지 알아야 제대로된 토론이 가능하다. 아직 몸(또는 입)이 풀리지 않은 관객들이 그것도 그 큰 엘아센 극장에서 마이크를 들고 발언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도전이다. 제대로 된 토론이 될 수가 없다. 그나마 여유를 가지고 대화를 시작하려 했던 관객은 서두를 미처 마치기도 전에 토론이 끝나버려 발언을 중단해야 했다. 언제 끝날지 알려주지 않는 토론에 참여했던 관객들은 슈토크만 박사가 다시 마이크를 잡고 이제 그만 자기 대사를 이어가야 한다는 말에 기만당한 느낌을 받게 된다.
관객에게 즉석으로 말하게 하는 이 연극은 과연 혁명일까, 기만일까, 아니면 그러한 양쪽 의견이 서로 맞서는 걸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오스터마이어의 또 다른 게임일까? 조금 더 유익한 토론이 될 수 있게 하려면 지금 상황에서도 몇가지 개선 장치를 마련할 수 있을텐데 그런 생각을 못하는 것일까, 안하는 것일까? 4년전 처음 보았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토론 장면에 앞서 검은 색 무대 벽면을 흰색 페인트로 벅벅 칠하는 장면과, 토론이 끝날 무렵 객석으로부터 날아들기 시작한 물감 풍선들이었다. 블랙 박스 무대 마저 허물고, 형형 색색의 물감이 객석에서 무대로 날아드는 것, 이것은 아마도 오스터마이어와 무대 디자이너(Jan Pappelbaum)가 꿈꾸는 미래 극장의 이미지이리라. 하지만 그러기에 LG아트센터는 너무 크고 웅장하다. 사실 이번 공연에 내가 심적 거리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대에서 멀고 높이 떨어진 3층 객석에 앉아 있었던 나홀로 일행과 떨어져 반대편에 앉아 있었던 탓이 크다. 베를린에서 본 물감 풍선은 뻥뻥 잘 터졌으나, 엘아센에서는 배우들이 무대 위에 올라서서 조심스럽게 물감 풍선을 던지고 있었다. 물감 풍선은 충분히 터지지 않았고, 몇개는 무대 위에 뒹굴고 있었다. 맨 앞자리 관객들은 미리 준비된 비닐 천막으로 몸을 가리느라 분주했다. 급성 독감으로 내한 일정을 취소했다는 오스터마이어는 이 광경을 촬영한 영상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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