客記
Schaubühne, »Fräulein Julie« 본문
"이런 건 정말 처음 봐! I've never seen ever like this!"
어제 공연이 끝나고 나오는 길에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게 내 귀에 들어왔다. 그말이 재미있었다. 어제 밤 내가 본 것은 한편의 TV 드라마였고, 그건 내게도, 그리고 그 사람에게도 분명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은 적절한 반응이기도 했다. 나는 무대 위에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 한편의 TV 드라마를 보았지만, 동시에 내 눈에는 실시간으로 영상과 음향을 만들어내는 촬영 및 믹싱 현장도 감지되기 때문이다: 검은 옷을 입은 네 사람의 스탭이 4-5대의 HD 캠코더를 부산히 옮겨 다니며 무대 곳곳을 촬영하고, 인물들은 주방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지정된 자리에서 무대 구석에 설치된 모니터 화면을 보며 자기 앞의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는 것에 맞추어 동작을 이어간다. 스트린드베리의 원작이 크리스틴의 관점으로 다시 쓰여졌는데, 그에 따라 비중이 높아진 크리스틴의 역할을 Jule Böwe가 맡을 뿐만 아니라, 뒷모습을 담기 위한 대역(Cathlen Gawlich)이 있는가 하면, 무대 한쪽에서 온갖 음향을 만들어 내는 음향 스텝 중 한 사람(Luise Wolfram)이 손에 토시를 끼고 크리스틴의 손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크리스틴이 음식을 마련하는 장면은 첫째 쇼트에서 Ms Böwe가 주방 안에서 풀샷으로, 두번째 쇼트에선 무대 전면 우측(DR)에서 같은 음식을 담고 있는 Ms Gawlich의 어깨 너머에서 식탁을 내려다 보는 장면이, 그리고 마지막 쇼트에선 접시와 음식을 만지고 있는 Ms Wolfram의 손이 클로즈업되어 보여진다. 관객은 이러한 일련의 동작을 중앙의 스크린을 통해 보게 되는데, 따로따로 촬영된 영상들이 하나로 합쳐진 것을 확인하는 순간 무대 뒤 또는 객석 뒤 어느 곳에서 각각의 화면을 모니터링하며 스크린에 보여질 화면을 선택하는 스텝 또는 프로듀서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다.
극의 내용 자체는 이제는 너무나도 식상해져버린 치정극에 다름없지만, 이 공연에서 중요한 것은 쟝의 쇼비니즘도 줄리의 유약함도 아니다. 이 공연은 지난 세기 사실주의의 정점에 있는 작품을 오늘날 가장 사실적인 드라마 형태로 표현했다는 점 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이 최종적으로 보는 그 결과물이 사실은 엄청난 숫자로 토막난 장면들과 눈속임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폭로함으로써 하나의 무대 안에서 환영이 생성되고 파괴되는 것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분명 흥미로운 시도이다. 배우나 스텝들은 자기에게 드리워진 카메라가 꺼질 때마다 쉬지 않고 바쁘게 다음 쇼트를 위해 움직여 가지만, 그럼에도 배우들은 매우 진지하고도 심리적으로 인물을 표현한다. 그러나 역시 그런 연기가 몰입을 유도하지 않을 뿐더러 그저 파편화된 몸이 부각된다. 기억될만한 점은 이야기 자체가 주는 긴장감보다 라이브 TV 드라마 쇼가 중간에 혹시라도 NG가 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컸다는 점이다. 그것이 의도적인 것인지 장비의 기술적 한계인지 불분명하지만 불꺼진 무대는 어두웠고, 배우와 스텝을 따라다닌 수많은 카메라와 조명기들에는 전선이 길게 따라 붙어 다녔기 때문에, 동선에 대한 치밀한 계산이 없었다면 금세 엉켜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다음 날 공연에는 이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수가 실제로 있었든 없었든 간에 실수에 대한 의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극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장치로 작용한다.) 무대 위에서 빈 자리를 옮겨다니며 연주된 첼로 음악은 이 '잘짜여진' 쇼가 라이브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해준다. TV 드라마를 좋아하는 한국에서 공연된다면 큰 호응이 기대되는 작품이다. (2012년 10월 19일, 샤우뷔네 베를린)
http://www.schaubuehne.de/en/productions/miss-julie.html/m=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