客記

닥터 슬럼프: 1. 읽느냐 쓰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본문

닥터 슬럼프

닥터 슬럼프: 1. 읽느냐 쓰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스테레오 2011. 9. 17. 01:39
0. 닥터 슬럼프
나는 샤워를 할 때 뭔가 중요한, 적어도 나 스스로는 중요하다고 여기는, 생각들이 떠오른다. 오늘도 가까스로 논자시를 보고 잠시 운동을 한 다음 샤워를 끝낼 쯤이었다. 공부를 하면서 겪는 어려움들을 기록으로 남겨 두면 나중에 다시 돌아볼 거리가 생기고, 혹시라도 같은 길을 걷는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그러면서 동시에 이걸 연재하면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스쳐 지나갔고, 그때 이미 "제목을 뭘로 정하지?"라는 한줄기 생각이 앞서 지나가기 시작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을 때 떠오른 제목이 바로 "닥터 슬럼프"이다. 어릴 적 동명 제목의 만화를 볼 당시만 해도 이 박사 참 비호감이다라고 생각했었다. 뭔가 어리숙하고 어리버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사 학위 하나 받아 보겠노라고 아직도 대학에 남아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껴지면서 그 제목에 대한 애착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내가 어떠한 슬럼프에 빠지는지 냉정하게 잘 살피는 것이 당장은 아니더라도 훗날 그러한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한 발판이 되어 주지 않겠냐는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튼 닥터 슬럼프는 그러한 생각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또 한가지 이유는 언젠가부터 글쓰기를 거부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내 블로그를 꾸준히 방문하는 독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고마운 분이 있다면 거의 100일 이상 새로 등록된 글이 없다는 걸 금새 눈치챘을 것이다. 혹시라도 뭔가 써놓고 공개하고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세상을 밝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건 없다. 잠시 찾아보니 지난 백일 간 끝 맺은 글은 단 한편―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아의 여인들》에 대한 텀 페이퍼―이 유일했다. 물론 여러가지 사정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 스스로를 큰 틀에서 봤을 때 글로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싶은데, 글을 쓰지 않으면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 지금 내 형편에서 쓸 수 있는 글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다가 나온 것이 또한 이 "닥터 슬럼프"이다. 이 글들은 내가 주인공이고 넌픽션 반성문이다. 주로 자아 비판에 가까운 내용을 가능한한 숨김 없이 써보려고 한다. 숨기려면 머리를 굴려야 하고 앞뒤를 맞춰야 하니 일이 더 많아져 귀찮아지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 한가지 이유이고, 또 한가지는 이러한 원칙이 숨길 일 자체를 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의 글들은 자학이거나 위선이다. 

Disclaimer
A. 제목을 엄밀히 하자면 "닥터가 되려는 몸부림에서 생긴 여러 슬럼프들" 정도가 되겠다. 혹시라도 이 글을 보고 박사를 사칭한다고 고발하시려는 분은 이 점을 널리 헤아려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이 글을 시작하는 나는 현재 수료생에 불과하다. 
B. '닥터 슬럼프'를 주기적으로 연재할 계획은 없다. 그저 공부하기 싫은 때, 책상에 앉아 뭔가를 시작해야 하는데 마음이 산란해서 잘 잡히지 않을 때 몇자씩 적어볼 생각이다. 그러니 괜히 다음 편을 기다리지 마시길.  

1. 읽느냐 쓰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일주일 정도 논자시 공부에 집중하다가 간신히 시험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논문으로 복귀. 그러나 사실 논문은 시작했다고 말할 수 없다. 아직 주제가 확정된 것도 아니고 지도교수와 교감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다만 몇가지 사정에 의해 짧게라도 연구계획서를 써야할 필요가 생겼고, 또한 실제로 이제 남은 건 논문밖에 없으니 더 이상 피할 곳도 없는 형편이라 거의 한달 가량 이걸 붙들고 혼자 씨름을 하고 있다. 
현재 나의 상태는 '간단하게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글이 나오지 않아 적잖이 당황했음'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거다: 사실 쉽게 쓸 수 있지 않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마땅한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막연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한편으론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동시에 이런 시간이 나에게 필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불평할 마음은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는 항상 뭔가 잘 준비된 상황에서만 다음 걸음을 뗄려고 하는데, 그러다보니 항상 때를 놓치는 성향이 있다. 또한 이 문제는 대인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이건 주로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더 자주 발견되는데, 나는 자주 상대방을 무척이나 답답하게 만들고, 그래서 답답하다 못해 지친 상대방이 마지 못해 움직이거나 상대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움직이는 고질적인 행동 패턴을 가지고 있다. 아무튼 이러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외부의 자극 없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불편하더라도 견디고 넘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분명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다. 그렇다고 일이 잘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글 쓰기는 쉽지 않다. 그동안 이 연구 계획서를 쓰기 위해 몇번의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A4 한 장을 채우지 못한 채 글은 조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지금 이 일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도는 좀처럼 나가지 않는다. 그렇게 조각은 늘어만 가고 ...
그러면서 몇 가지 부작용이 생겼다: 먼저 연장 탓을 하기 시작한다. 요즘은 주로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해 유비쿼터스 환경에서 글을 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편에서 할 말이 있다.) 그래서 적어도 기가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지금 밖이라, 또는 이동 중이라 쓰지 못했다는 핑계는 대지 못한다. 그러나 피할 곳 또한 유비쿼터스임을 깨닫게 된다: 노트북이 소음이 심해 집중을 방해한다; 노트북 발열이 심해 키보드가 뜨거워 손에 땀이 난다; 스마트폰은 자꾸 오타가 난다; 아이패드는 폰트가 마음에 안들고 한글 지원이 부실하다!!
또 하나는 이번 글의 제목에 있는 내용이다. 이건 사실 예전부터 있었던 증상인 것도 같다. 글을 좀 쓰다 보면 나의 무지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뭔가 좀 더 읽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서 읽다 보면 뭔가 떠오른다. 그래서 이번에는 읽던 걸 잠시 내려놓고 다시 쓰기 시작한다. 이게 선순환되면 참으로 좋을 일일텐데, 유감스럽게도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게 문제다. 결과가 말해준다. 읽은 것도 얼마되지 않고 쓴 것도 얼마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읽어야 하는 게 아니고, 잘 안 읽히면 책을 덮는다. 그리고 뭔가 끄적거린다. 또는 글이 잘 안 써진다. 뭔가 써야하는데 써지지 않는 건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자리를 바꾸기도 하고, 앞서 말한 것 처럼 연장을 바꿔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더 참지 못하고 독서의 피안으로 도피를 하는 것이다. 사실 독서로 도피하기만 해도 다행일텐데 대부분은 좀더 쉽고 편한 여흥이나 쉴 곳을 찾아 떠난다.
현재로서는 시간을 정해놓고 도망치지 않는 훈련이 필요한 것 같다.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에 자료를 읽는 일이든지, 글을 쓰는 일이든지, 그 일이 잘되든 안되는 끝까지 버티는 훈련이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그러다보면 뭔가 뚫리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이 훈련의 결과는 한달 후에 다시 점검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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