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客記
나는 띄어쓰기 따위는 좀 틀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시는 극단적 경우가 아니라면 '띄어쓰든' '띄어 쓰든' 뜻을 파악하는 데 크게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한 번, 두 번 같이 횟수를 나타내는 번을 띄워야 하는 게 여간 불편하지 않다. 이론적으론 알겠으나 내 머릿속에는 한이란 말과 번이란 말 사이에 어떤 공백을 부여한다는 게 늘 낯설기만 하다. 그러나 내로남불인지 아래와 같은 문장을 책에서 읽게 되면 종종 평정심을 잃는다. "여기 와본지가 꽤 오래되었거든요. 작년에 카나리아를 싸게 팔고 다니던 장사가 있었어요. 그때 한 마리 샀는 지는 모르겠어요." 의존 명사 지와 어미 -지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정확히 반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물론 뜻이 안 통하..
미야시타 나츠, , 이소담 역, 예담, 2016. 양과 강철의 숲이란 피아노에 대한 복합적 비유다. 일반인들에게 피아노를 소재로 접근하라 하면 대부분 나무가 먼저 떠오를 것이고 간혹 상아로 만든 건반을 생각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피아노의 구조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강철로 만든 피아노 현 정도는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양(羊)은 뭐란 말인가? 건반을 눌렀을 때 현을 때리는 망치(해머)가 펠트로 감싸져 있다는 데 답이 있다. 펠트는 울에서 왔고 울은 양에서 왔음을 알아야 비로소 양이 피아노와 연결된다. 그렇다. 양과 강철의 숲이란 적어도 현과 해머가 있는 어쿠스틱 피아노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는 사람과, 그 건반이 해머를 통해 현을 두드릴 때 올바른 소리를 내도록 하는 조율사에..
제리 무어 지음, 김우영 역, 제2판, 한길사, 2016. 누군가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 사람의 주저를 읽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주저에 바로 뛰어드는 것은 어렵다. 내 경험상 심오한 사상가일수록 그런 시도는 무모했다. 물론 그건 그 책에 문제가 있기 보다 독자인 내가 준비가 되지 않아서였다. 어떤 분야는, 어쩌면 대부분은, 입문서조차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나는 해당 분야의 대표적 인물의 전기로부터 도움을 많이 얻는다. 어쩌면 수박 겉핥기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으나, 누군가를 얼마간 이해했다는 착각이 그의 사상에 더 깊이 들어갈 용기를 부여한다. 제리 무어의 은 이런 점에서 나에게 적합했다. 인류학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 밖에 없는 내게는 “인물로 읽는 인류학의 역사와 ..
촌부의 명랑한 노래 한 곡조가 베토벤의 소나타보다 더 훌륭한 예술이라 주장하는 톨스토이의 민중지향적 감염 예술론, 톨스토이는 예술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노력[노동]과 생명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 상호간의 애정까지 파괴하면서도, 그 본질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예술론을 시작한다(제1장). 그렇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는 활동이 과연 진정한 예술이고, 이것은 그만한 희생을 강요해도 좋은 만큼 중요한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먼저 다음과 같이 묻는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좋은 예술이란 무엇인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일반적 대답은 예술은 미를 산출하는 것이다라는 것으로(제2장),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미란 무엇인가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