客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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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감동의 오뒷세이아? 마부 마인 <인형의 집> 리뷰

스테레오 2008. 4. 5. 09:37

2008년 4월 4일
LG 아트센터

expecting overcodes,
embarrassed by undercodes



그동안 이 공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응들을 보였다고 한다. 적절한 변경을 가하여(mutatis mutandis) 옮겨 적어보면:

'매일 밤 찾아 헤매왔던 감동의 그 순간을 맛보게 하는 작품' _ 르 몽드(프랑스)

'때로는 소름이 돋는 듯 짜릿하고, 때로는 혼란스럽다. / 너무도 매혹적인, 반드시 보아야 할 작품!'_뉴욕 타임즈(미국)

'매혹적이면서도 혁신적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평생 동안이라도 논의할 수 있다. / 이 시대를 위한 '노라'_르 피가로(프랑스)


진정한 '감동'을 찾아 방랑하는 오뒷세우스여, 핥는 리뷰에 낚이지 말지어다!
  1. 이 작품에서 감동을 느끼는 분은 대단한 사람이다. 내가 보기엔 가능한 한 감동하지 말고 지적으로 접근하라는 것 같았는 데 말이다.
  2. 시작할 때 약간 짜릿한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감동은 전공자들이나 느끼는 키치적 감성이겠지만, 시작과 동시에 만들어지는 삼면의 벽에서 '제4의 벽'이 머릿 속을 스쳐 지나갔다면, 당신은 분명 서양연극사 책을 좀 들여다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3. 리 브루어 자신도 이 프로덕션 만으로 평생을 논의할 수 있을까? 입센의 <인형의 집> 자체로도 평생을 논의하기엔 좀 지루하지 않을까? 스타일이 새롭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존의 것을 재활용하는 데 더 비중이 있다고 보이기에 혁신이라는 단어에는 선뜻 동의할 수가 없다.

역시나 마부 마인 <인형의 집>의 키(key) 포인트는 배우의 키에 있을 것 같다. (매우 효과적인 '반대들의 결합'이지만 이러한 설정이 극단의 의도와는 달리 정치적 올바름의political correctness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점은 차치하도록 하자) 이것은 원작을 글자 그대로(literal) 활용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반어적으로 이용한 것이기도 하다. 토어발트는 실제로 두 배는 커보이는 노라를 시종일관 '내 작은 종달새(my little songbird)'라고 부르고, 때로는 '지금 나 더러 작다고 한거요?'라며 발끈하기도 한다. 리 브루어와의 서면 인터뷰에 보면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브레히트가 1968년에 베를리너 앙상블에서 <코리올란>을 연출할 때, 귀족 영웅들을 군인들보다 키가 작은 사람들로 캐스팅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마치 만화 속 인물들처럼 보이게 되었다. 나는 이런 방식을 통해 귀족계급을 풍자하고자 한 브레히트의 아이디어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키 작은 남성 배우들을 기용하여 남녀의 키차이를 극대화함으로써 가부장적 제도와 그 모순을 풍자하고자 했다. (프로그램 '연출가 인터뷰에서)

(밑 줄 부분은 문제가 있다. 브레히트는 그보다 12년 전(1956년 8월)에 이미 고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연출가의 의도는 명확히 관객에게 전달된다. 사실 그 은유가 너무나도 명확하고 또 그래서 너무 고정된 이미지로 다가온다는 인상을 받아버려, 나는 이번 공연에서 예고 동영상 이상의 것을 볼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공연 1막에서는 우려했던 바가 실현되었고, 2막에서는 (다행히도) 나름 얻는 게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매일 밤 찾아 헤매왔던 감동' 같은 건 없다. 르몽드 氏처럼 매일 밤 찾아 헤매었었더라면 나의 실망은 분명 적지 않았을 것이다.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 대목은 "Chinese!" 였다. 연출이 이 대목에서 생소화효과(Verfremdungseffekt)를 의도했다는데, 그 순간 나도 무언가를 얻은 게 있으니 스트라이크 하나 잡은 기분이다. 1막에서 집중하기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입센에 대한 나의 '고정된' 기대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먼가 진지한 '정극', '사실주의'의 진수를 맛보고 싶고, 어딘가 한편 나를 빨아 당겨 보시오 하는 뜬구름 같은 기대가 한편에 있었나 보다. 그런데 Chinese에서 (인터미션 때 피아니스트가 중국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한 게 도움이 되었다.) 피아니스트가 발끈 하고 일어서는 대목을 보며 그제서야 이 공연이 어떤 주파수로 송출하는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마치 <심슨 가족>의 한 대목을 보는 듯한 이 장면이 나에게는 꽤나 중요한 장면이었다.


그 이후에 내 나름대로 얻게 된 것은 다음과 같다: 이 공연이 나같이 진지한 입센을 기대하는 관객을 꽤나 짖궃게 비꼬고 있다는 것(sarcasm), 그리고 이를 위해 키치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유희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Camp). 프로그램에서 연출가가 포스트모던적인 작품이라 밝히고 있는 것을 보니 내가 얻은 게 완전히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또한 이러한 공연 스타일이 오늘날 적절하다고 수긍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점에서 연출력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프로그램에는 <Green Integer Review> 2007년 2월호에 개제된 Douglas Messerli의 리뷰를 수록해 놓았는데, 대체로 수긍할 만하지만, 그 필자가 마지막에 노라가 옷을 모두 벗은 대목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는 점은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 (나 자신도 머리마저 벗어 던지는 데 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 역시 입센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옷을 벗음은 남편에게 받은 것을 버림을 뜻하며, 머리털을 벗어 던짐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때, 신체발부수지부모(母)라는 공자의 가르침에 서양인들도 수긍할만하다는 걸 새삼 느끼게 한다. 비록 노라는 이것을 '불효'의 시작으로 사용하였지만 말이다.

<런던 타임즈>는 극단 마부 마인을 '한없는 상상력을 지닌 극단'이라 말했다는데, 이러한 상상력은 희랍극에서 현대연극에 이르는 넓은 레파토리와 다양한 매체와 테크놀로지를 두루 다룰 수 있는 기술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아무튼 이번 공연을 통해 이들의 상상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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