客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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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놈놈놈의 역학과 한국형 웨스턴의 아이러니

스테레오 2008. 6. 20. 17:20

각자의 머리속에 대인관계에 관한 데이터베이스를 상상해보자. 상상이 어렵다면 실제로 DB 관리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이름, 성별, 나와의 관계 등이 기본 항목이라면 경우에 따라서는 외모를 평가하는 칼럼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고, 그밖에도 직업, 나이, 학력 등등 그 사람에 관한 모든 정보를 채워넣는 그런 DB를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이런 것들과 함께 그 사람을 전체적으로 평가하는 항목인 비고란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이 비고란은 그저 단순하게 좋음/나쁨이라는 두개의 구분자로 존재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대책없이 막연한 이 항목이 많은 부분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전부를 차지할 정도로 강력하게 작용하는 경우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이 항목이 나의 DB의 맨 앞에 놓여지는 것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좋음/나쁨

이름

관계

외모

(상/중/하)

직업

학력

성격

(상/중/하)

...

좋음 홍길동 친구 회사원 명문대졸
나쁨 허이녹 친구의 친구 무직 고졸


맨 앞에 놓여 있어야 할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 사람과의 만남, 전화 통화, 거래 등등이 이 항목의 결과값이 무엇이냐에 따라 즐거운 일이기도 하고 불편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나쁨으로 채워져 있는 경우에는 가급적 만남을 피하게 되고, 그 사람의 자체에 대한 불신까지 이어지게 된다.

또 한가지 이유는 이 항목이 한번 기재되었어도 조만간 바뀔 확률이 높기 때문에 잘 보이는 곳에 놓아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거의 바뀌지 않는 이름을 맨 앞에 두고 인덱스로 활용하는 것이 분명 더 편리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과의 만남이란 건 가나다 순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또한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 때 나에게서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역시나 나의 경우에는 그 사람이 나한테 '좋은' 사람이냐 아니면 '나쁜' 사람이냐 하는 문제인 것 같기 때문이다.

다시 이 항목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자. 주로 하는 실수는 어떤 사람의 외모를 먼저 보고 그 사람에게 좋음을 부과했다가 몇번의 대화를 통해, 혹은 나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저쪽의 지속적인 무관심으로 인해 좋음을 나쁨으로 바꾸는 상황이다. 물론 이것은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표시할 수 있다.

좋음

나쁨

마찬가지로 정반대의 경험을 통해 정반대 상황을 생각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한 역학은 좋음에서 나쁨으로 가든지, 혹은 반대로 나쁨에서 좋음으로 가든지를 기본으로 한다. 물론 무자르듯 명확하지 않은 경우에는 그 사이 어디쯤에 존재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음과 나쁨 사이 중간을 설정해 주는 것이 편리하다. 그렇기에 세상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할만 한 것이다: 좋은 놈, 나쁜 놈, 그리고 이상한 놈.

좋은 놈 - 나쁜 놈 - 이상한 놈의 역학
사람을 만나고 또 그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으로 구분짓는 행위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좋은 놈,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나쁜 놈일 수 있으며, 어떤 사람들에겐 아무리 봐도 이상한 놈일지 모른다.
***
주지하다시피 김지운은 영화를 장르로 접근한다. 코믹잔혹극(<조용한 가족>)에서부터 호러(<장화, 홍련>), 그리고 느와르(<달콤한 인생>)에 이르기까지(<반칙왕>의 경우 단순 코미디로 분류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보인다). 아무튼 장르에 충실한 영화를 만들고자 노력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은 일관된 흐름(또는 톤tone)이라 하겠다. 잘 못 만든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분위기의 급전은 아무리 아리스토텔레스가 급전을 높이 평가했다 하더라도 결코 환영받을만한 일이 아니다. 한국 사람들은 영화에서 연기나 상황이 꽤나 리얼한 것을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다보니 한국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분위기가 영화에 개입되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특히나 가족과 얽히고 섥힌 서글픈 이야기가 개입하면서 주인공이 좌절하게 되는 방향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이것은 감동없이 그저 감상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한데, 여전히 한국영화, (김윤철 교수가 일찌기 지적한 바 있듯이) 한국연극에서도 그러하다. 감상주의가 한국의 표준 드라마투르기인가 보다.
김지운이 장르 영화를 고집함으로써 그의 영화에서는 이와 같은 칙칙함이 날아가버리는 매우 큰 장점이 주어진다. 그러나 한국형 웨스턴이라는 장르는 또다른 난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먼저 서부영화의 일반적 성격을 생각해보면, 1. 법보다 주먹(총, 칼 등등)이 앞선다; 2. 사실상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같은 범법자들이고 서로에겐 다들 나쁜 놈이지만, 관객이 동일시하게되는 좋은 놈이 있기 마련이다; 3. 공권력을 대표하는 인물들(보안관, 관료, 군인 등등)이 보통 더 나쁜 놈이다; 4. 그리고 이 모두를 포괄하는 공간적 배경은 바로 황량한 곳(黃野)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 황야라는 곳은 원래부터 황량한 곳이었던가? 북미 대륙의 서부나 만주 벌판이 황량하게 된 것은 외부 세력에 의해 개척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주민들이 쫓겨난 공간이기에 (비록 워낙 모래 바람이 불고 가시 덤불이 굴러 다닌다 하더라도) 황량하게 된 곳 그곳이 바로 서부가 아닐까? 조선 땅 떠나면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손가락 귀신 윤태구에서 한국형 웨스턴의 아이러니를 발견하게 된다. 제국주의자들의 힘에 의해 황량해진 만주벌판에서 또다른 개척받은 민족 조선의 무법자들. 이들과 근원적으로 개척자의 입장에 있던 미 대륙의 무법자들 사이에는 공통점과 함께 차이점도 엄연히 존재할 것이다.
영화 속 도원의 말처럼 쫓는 자는 또 다른 자에게 쫓긴다. 지도의 보물을 좇아 가는 윤태구는 삼국파와 창이에게 쫓기지만 일본 제국군에게는 이들이 도무지 다를바 없이 한 패거리로 인식되고, 그들을 쫓는다. 이들을 바라보던 도원은 다시 추격자들의 무리 말미에 있는 제국군을 쫓음으로써 자신의 말을 입증한다. <TII>에서 터미네이터가 할리 데이비슨을 탄 채 한 손으로 총을 돌려가며 사격을 하던 그 간지 그대로 도원은 마상에서 이들을 제압한다. 제국군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한들 무슨 소용이랴. 총알 피하기 신공을 어처구니 없어하는 관객도 있지만, 이 총질은 이 영화가 가진 근원적 아이러니를 날려버리기 위한 몸부림이나 다름 없으니 어찌 도원의 몸에 상처가 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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