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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 PC방>: ‘극사발’의 순수하지 못했던 소원

스테레오 2013. 10. 9. 21:47

극사발이란 집단이 있다. 풀어보면 꽤 도발적인 이름이다: ‘연극을 통한 사회적 발언’. 이들은 유난히 더웠던 지난 여름 작품 하나를 연습했고, 얼마 전 창단 두 번째 공연을 마쳤다. 그런데 이들이 서울프린지페스티벌에 출품한 이 작품은 비주류 예술을 위한 축제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 연일 신문지상과 트위터를 통해 뜨겁게 다뤄진 핫이슈인 국정원 불법 선거개입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품 속에서 ‘남조선일보’라는 가상의 유력 일간지 기자가 등장한다 하지만, 연극 잡지보다 먼저 시사주간지에 공연에 대한 기사가 대서특필 되는 것만 보더라도 이 작품이 얼마나 프린지의 축제 정신에서 벗어나 주류 문화를 지향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5352.html).

작품의 내용을 살펴보면 극사발의 순수하지 못한 의도, 혹은 그들의 은밀한 소원이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이들은 국정원 여직원의 댓글 사건을 얼마전 인기리에 방영된, 그리고 후속편까지 제작된 비밀 정보 요원의 로맨틱 드라마 <아이리스>에 접목시켰다. 주인공에게 ‘이병언’과 ‘김태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얼핏 보면 이 드라마를 단순 패러디하는 것 같지만 여기에도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다. 이것은 짐작컨대 ㅇ과 ㅎ의 차이를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동아시아 한류팬들 및 헐리우드 상업영화 팬들이 실수로 티켓을 사도록 유도했던 것같다. 그나마 이러한 꼼수에 현혹되지 않는 현명한 국내 관객들만이 참석했던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아이리스 PC 방 대본 다운로드

연출이 직접 연기를 하면서 극의 방향을 “초현실주의”로 가져 간 것은 표현의 자유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몰라도, 실존하는 피씨방 브랜드를 작품 제목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공연의 제목 “아이리스 PC방”은 단언컨대 노골적인 PPL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해당 PC방 프랜차이즈로부터 어떤 대가를 받았는지 함구한  채 ‘텀블벅’이라는 온라인 후원 프로그램에서 공공연히 제작비를 모금했기 때문이다 (https://tumblbug.com/ko/projectpass_iris). 총 모금액 230여 만원으로는 다섯 명의 배우와 스탭 세 명의 밥값으로도 빠듯했을 텐데 정교하게 출력된 아이리스 로고라든지 아크릴로 제작된 PC 모니터, 모형 노트북과 같은 소도구, 그리고 적지않게 삽입된 시청각 자료는 제작비에 관한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 물론 여기에 배우와 스탭들의 개런티를 포함해야 한다. 그들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합리적 호모 사피엔스라면,  작년 <BBK라는 이름의 떡밥> 공연을 하면서 겪었던 ‘노개런티’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이번 일을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단순 추정을 넘어 확신을 주는 정황이 최근 <희곡을 들려줘!>라는 한 팟캐스트 채널을 통해 거의 라디오 방송극에 가까운 퀄리티로 <BBK> 대본을 녹음해 공개했다는 사실에서 포착된다. 극중극 구조를 빌린 이 작품은 <BBK 치킨의 진실>이라는 작품을 연습하는 과정에서 ‘연극에 통한 사회적 발언’에 대한 팀원 내부의 이견, 그리고 자신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하면서 사회 정의를 말하는 자기 모순을 매우 자전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아이리스>를 공연하기 직전에 아이튠스를 통해 <BBK>를 전세계에 공개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그들이 <BBK>에 담아 놓은 문제점들로부터 자유롭다는 자신감의 표출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음의 링크를 통해 직접 듣고 확인할 수 있다: http://goo.gl/UbVKEC)

만에 하나 이번에도 제대로 된 보수 없이 진행되었다면,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건 단순한 취미활동이라고 할 수 없다. 누구도 취미로 자기가 업으로 삼고 있는 일을 하지는 않는다. 백번 양보해서 재능기부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불편하지 않을 수 없다. 소득 최하위 구간의 비정규직 예술노동자들에게 대가를 주지 않고 그들의 재능을 요구하는 것만큼 부당한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재능을 이토록 저렴하게 이용하려는 자, 혹시라도 있다면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배후에서 이런 일을 도모하고 조종하는 사람은 하루빨리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최소한 이 작품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어쩌면 그들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다음과 같은 말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작품에 드러나는 지극히 정치적인 입장은

 "학자를 그의 생활조건으로부터, 계급, 신념체계, 사회적 지위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관련되는 사실로부터, 또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행하는 단순한 활동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

는 사이드의 자각과 유사하다 (<오리엔탈리즘> 31). 사이드가 "참된" 지식이 비정치적이고 중립적이라는 리버럴한 의견에 반대하듯이 극사발은 그들의 연극이 그들이 올라서는 무대가 자리한 사회의 정치적 현실을 초월한 순수한 예술이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점을 망각하고 있다. 사이드가 지식인에게 정치적 감각을 일깨우고 그것을 표현하도록 촉구할 당시 그는 이미 미국 명문대학에서 대우받는 교수였으며, 그의 발언이 당파적이되 최고권력자나 정보기관을 겨냥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점 말이다. 바라건대 그들의 다음 이야기는, 그들 스스로의 바람대로, 좀더 ‘보편적’일 수 있기를. 아니 그럴 수 있는 시국이기를. 덧붙여 '극사발'이라는 이름이 거추장스러울 만큼 우리 사회가 연극인들의 '사회적' 발언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게 되기를.


드라마인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http://www.drama-in.kr/2013/09/blog-pos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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