客記

《가족오락관》의 검은 그림자 본문

공연

《가족오락관》의 검은 그림자

스테레오 2010. 8. 21. 12:50
이오진 作, 김태형 연출, 《가족오락관》(2010.08.19~09.05, 대학로 게릴라 극장)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아버지의 죽음은 남겨진 가족들에게 힘겨운 날들만 안겨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회식 2차로 갔던 노래방에서는 어머니가 도우미로 들어오고 자기가 싫어하는 (그리고 자기를 싫어하는) C조팀장은 어머니를 끌어안고 부비댄다. 아들은 자기 가족에게 이같은 불행이 찾아온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묻기 시작한다. 아들은 아버지를 죽여놓고 자기는 잘 살고 있는 원수(a)를 죽이면 좀 살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온 가족이 그 일에 동조, 동참하게 된다. 그랬더니 그들에게는 새로운 원수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딸의 원수(b), 엄마의 원수(c), 아들의 원수(d)를 차례로 죽인다. 그런 다음 이 가족의 진짜 원수(e)를 죽이고, 그러고도 살인은 계속된다(∞). 

이 연쇄살인 이야기에 접근하는 틀로 제시된 것은 자칭 "그로테스크 블랙 코미디"이다. 그런데 이 작품 어떤가. 나를 비롯하여 같이 본 관객들이 그다지 웃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에서 주어지는 상황은 그다지 웃을만하지 않다. 최소한 이 점에서는 이 작품이 블랙 코미디와 공통된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블랙 코미디를 보는 관객은 어디서 어떻게 웃을 수 있을까. 상황은 실상 너무나도 심각한 도덕적, 사회적 문제 투성이지만, 그 상황을 풀어가는 주인공들이 관객의 일반적인 (또는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말과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할 때, 그 의외성이 웃음을 유발한다. 따라서 블랙 코미디를 제대로 즐기려면 바로 그 엉뚱하고 기괴한 것, 지나친 것 자체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공과의 거리가 필요하다. 

이 작품에서는 분명 인물에 대한 거리감을 확보하고 있다. 다만 그 방법이 효과적인지는 의문이다. 빠듯한 살림에 아버지는 갑자기 죽고 할머니는 그 충격으로 몸저 누웠다. 남은 가족은 제각기 돈 버느라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다. 그러한 상황에 처한 관객들은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자기 연민이라 할지라도) 주인공 가족에게 동정을 보내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결정은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아니 심정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아버지의 원수(a)를 죽여 암매장하는 순간 관객은 그들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를 통해 관객은 인물과의 거리감을 확보하게 되고 그들의 기행에 웃음을 터트릴 준비를 할 수 있다. 그들은 더이상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고 이상한 또는 미친 사람들일 뿐이다. 

그런데 다음 살인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주인공 가족 중 누군가의 또다른 불행이 소개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사연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주인공이 불쌍하지 않고 다음번 살인이 이를 통해 유발되겠다는 신호로 다가올 뿐이다. 신호가 가족들 각자의 사연이 소개되는 방식으로 반복되면서 무뎌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좀더 자극적이 된다. 그러나 이미 패턴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은 관객은 그 자극에 특별한 반응을 하지 않는다. 이처럼 불행1-복수1-불행2-복수2-불행3-복수3 ... 으로 진행되었을 때에는 뒤로 갈 수록 그 효과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차라리 불행은 불행대로 복수는 복수대로 하나로 묶어서 펼치는 게 더 강한 효과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거리감을 획득했음에도 웃음이 터지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코미디에서의 웃음은 관객이 인물보다 우위에 있음으로 인해 발생한다. 다시 말해 관객에겐 너무나 확연히 보이는 게 인물에게는 보이지 않을 때 웃음이 터지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의 문제는 인물들이 코미디로서는 불필요하게 너무 많이 안다는 데 있다. 즉 그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그릇되더라도)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군데군데에서 잘못 되었음을 깨닫고 되돌아가려는 몸부림이 감지된다. 그냥 어렵더라도 계속 착하게 살든가(멜로드라마), 사고를 치고 행복하게 살든가(블랙 코미디), 사고를 친다음 그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든가(비극) 해야 할텐데 이들의 위치가 어중간하다는 게 문제로 보인다. 착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고, 책임지지도 않는다. 관객은 울어줄 수도 비난할 수도 없으며,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이 작품이 차라리 비극을 지향했더라면 어땠을까? 비극은 고대 희랍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지만, 결말에 가서 주인공 가족의 몰락을 많이 보여주었다. 메데아는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죽이고, 크레온은 자신의 명령을 어긴 안티고네를 처벌하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아들과 부인을 잃는다. 햄릿도 아버지의 복수를 이루기 위해 자기 자신의 목숨 뿐만 아니라, 어머니까지 제물로 바치게 된다. 이 작품 또한 가족의 몰락이라는 면에서는 비극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거실 영정사진이 늘어가는 것이 이 점을 분명히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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