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공연 (44)
客記
I can take any empty space and call it a bare stage. A man walks across this empty space whilst someone else is watching him, and this is all that is needed for an act of theatre to be engaged. 피터 브룩의 The Empty Space를 시작하는 저 유명한 문장에서 ‘to be engaged’란 말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재공연 도입부를 보다가 문득 의문이 생겼다. 리뷰까지 썼던 초연을 보면서는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이 공연에서는 ‘시작하다’라는 뜻으로 사용했다.어떤 사람이 지나가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바라본다면 그것으로 연극이 ..
사실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지만, 이야기가 새로울 건 없었다.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장기 기증에 대한 이야기는 ‘슬의생’이나 ‘유퀴즈’에서도 다루었을 만큼 ‘흔한’ 이야기지 않은가. 하지만 흔하다는 말은 필멸의 인간이 이 주제에 대해 감히 붙일 수 있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더군다나 이 사건에 관여한 사람들 각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아주 넓은 스펙트럼의 감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보편적인’ 이야기가 가진 힘이 있었다. 공연을 보면서 내가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어떤 대사 때문이었다. 정확하지 않지만 기억에 남아 있는 대로 옮겨 본다. “환자 누구라도 자신에게 적합한 장기를 기증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환자의 권리라면, 논리적으로 볼 때 우리 모두에게는 장기를 ..
거국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이 아니라 로큰롤를 향한 한 개인의 덕심열정이야말로 민주주의의 바퀴를 움직이는 숨은 힘이다. 조금 덜 학구적이고 훨씬 더 일찍 그리고 더 많이 라이브 음악이 무대를 장악했더라면 어땠을까? 영화를 보면서도 떼창을 하는 흥부자 한국인이 로큰롤이란 말에서 기대하는 것을 채워주기엔 공연이 몇몇 배우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바깥의 날씨만큼 차가웠다.
지난 여름 놓쳤던 뮤지컬 를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관계자의 초대를 받아 제한적 상영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연극이나 오페라를 스크린이나 화면을 통해 고화질 영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점차 늘어가고 있다. 영국의 국립극장 라이브(NT LIVE)의 레퍼토리는 남산국립중앙극장이 도맡아 상영하고 있으며,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메가박스 몇몇 곳에서 상영하고 있다. 런던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의 작품들은 DVD로나, 혹은 온라인 스트리밍으로도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영국 주요 극장의 공연 실황을 https://www.digitaltheatre.com 이란 사이트를 통해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국내에서도 몇 해 전부터 공연 영상화 사업이 추진되고 있으며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예술의..
고연옥 작, 김정 연출, 남산예술센터 어미가 새끼를 죽이는 일은 동물 세계에서는 드물지 않고 희랍의 메데이아나 우리네 곰 신화에서도 이따금 발견되지만 현대인의 감각으론 무대에서라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상상력의 주파수를 고대와 현대, 그리고 비극과 멜로드라마의 어느 중간 지점에 맞춰보자. 곰과 사람이 동거하고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다는 상상은 우리가 열망하는 순수한 사랑이 어쩌면 짐승만도 못한, 욜로라는 자기애의 다른 이름이 아닌지 묻게 한다. 무대 중앙 바닥이 두 가닥 철선으로 들어올려질 때 굴은 잠시나마 바닥과 벽이 구획된 집의 형상을 갖춘다. 하지만 이 벽을 지탱하는 철선은 부부의 유대감 만큼이나 가늘고 그래서 불안하다. 세상에 잘못 태어난 아이는 없다. 부모가 벽의..
원주소: http://www.drama-in.kr/2017/12/you-know.html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원작 권여선각색/연출 박해성 출연 신사랑, 황은후, 노기용, 우정원, 신지우2017.11.23-12.03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연극 는 동명 제목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 적절한 신체와 음성을 부여했다. 이 과정에서 원작 소설의 서술 방식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서스펜스는 아쉽게도 사라져야 했다. 권여선의 원작은 각 소절이 서로 다른 1인칭 화자에 의해 서술됨으로 인해 독자가 해당 소절을 읽을 때 이번에는 누가 서술자인지를 찾아야 하는 수수께끼가 주어진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독자에게 일정한 긴장감과 능동적 참여를 허락한다. 이 두 가지는 두 형식이 가진 특성을 서로 맞바꾼 것이..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indienbob.tistory.com/1033) 의 리뷰를 의뢰받았을 무렵, 한 외국인 연극학자와 만날 약속이 있었고, 그가 한국의 번역극이나 문화상호주의 연극을 보고 싶어 했기에 나는 이 공연을 같이 보자고 제안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불안했다. 아슬아슬하게 일정이 어긋나지만 않았어도 훨씬 더 유명하고 검증된 공연을 택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론 사계절 연극제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봄 공연을 놓친 것이 아쉽기도 했지만, 내가 관람하는 것과 누군가에게 추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다행히 공연은 내게도 손님에게도 흡족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게 물었다. 왜 햄릿이어야 하느냐고. ‘왜, 햄릿이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라고 대답하고 넘..
김재엽의 이번 베를린 기행에 공감하지 못했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그 보다 조금 일찍 같은 곳을 다녀온 나는 그저 연극에 등장하는 장소와 인물만으로도 볼 거리가 충분했지만, 그런 추억과 향수가없는 사람들은 아마 더 보편적이거나 극적이기를 기대했으리라. 생각은 자유에서도 나는 왜 조그만 일에만 분노하는가와 마찬가지로 극중 인물 김재엽은 극이 끝날 때까지 아무런 글을 쓰지 못한다.물론 쓰지 못한 그 글로 하는 연극을 본다는 아이러니도 여전하다. 하지만 남산에서 김재엽은 당시 상황에서 연극으로 뭐라도해보겠다는 절박함의 크기에 비해, 시인의 삶을 뒤쫓는 것 외에무엇을 해야할지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고 그래서 무기력했다. 반면 생각의 자유 속 김재엽은 보다 분명해지고 단단해졌다.그의 베를린 찬사는 그곳 연극에 대..
기자들이 기사 쓰기 좋을 작품이다. 제4의 벽 따위야 무너진 지 오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무대와 객석이 토론을 펼치는 연극이라니. 이 뭔가 새롭고 흥미진진한 구도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는 것보다 기사를 통해 재현된 모습을 읽고 있는 편이 더 행복하다. 관련 기사에 따르면, 첫날 공연의 토론 시간에선 그나마 사대강, 옥시와 같이 현재 우리 사회의 현안들이 언급되었다(한겨레). 하지만 그것을 "열띤 토론"이었다고 기록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첫날 공연을 관람한 관객들이 SNS에 남긴 증언에 따르면, 중요한 키워드가 나왔을 뿐이지 토론의 수준이 결코 높았던 건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도 트위터에 남긴 관객들의 글을 살펴보면 이 독일 연극은 꽤 만족스러웠던 것 같고, 앞으로도 좋은 기억으로 ..
역사 교과서로 하 수상한 시절에 선덕 여왕과 천명 공주를 다루는 연극 한편이 공연되고 있다. 국정화 이슈가 막 시끄러워질 무렵 나는 이 또한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 될 수 있겠다는 상상을 해보았다. 정부 주도의 획일적 역사관 주입에 대한 반발로 이를테면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같은 역사교양서들이 재조명되고 그 결과 출판계에서 역사 붐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하는 전망이었다. 하지만 국정화 고시가 이루어진 이 시점까지 인터넷 서점 베스트셀러에 신간 역사책이 전면에 배치되거나 지나간 책들이 차트를 역주행하는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고 있다. 역사라는 말만 들어도 짜증이 나기 때문일까? 역사를 소재로 한 연극을 찾아 볼 여력이 생기는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무대 양 측면으로 분할 배치된 객석은 절반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