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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과유불급: 아미시 프로젝트

스테레오 2011. 3. 23. 03:44


"Jessica Dickey is giving such an extraordinary performance. The play is also a remarkable piece of writing."
— New York Times - To read the full review in the New York Times please click here

"Dickey does a terrific acting job under helmer Sarah Cameron Sunde..." 
— Variety

"The Amish Project is thought-provoking, compelling theatre..."
— nytheatre.com

"(Dickey's) craft made me weep. The virtuosic writer-performer acts her bonnet off."
— Time Out New York


이 작품의 미국 초연에 대한 반응은 분명 위와 같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국내 번역 초연에는 아쉽게도 위의 찬사까지 따라오지는 못한 것 같다.  

비록 이 작품이 아미시 공동체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 사건과, 사건 자체보다 더 놀라운 피해자 가족들의 즉각적인 용서와 화해를 다루고 있다 하더라도 이 연극의 힘은 줄거리 자체에 있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말하자면, 이 이야기 자체에는 어떠한 극적 발견도 반전도 없다. (또한 적어도 한국의 관객에게 이 주제 — 살인사건으로 인해 겪는 피해자 가족들, 그리고 가해자의 가족이 겪는 고통 — 는 이창동 감독의 최근 두 작품을 통해 이미 접한, 그래서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초연이 호평을 받았다면, 그것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에 있었다는 뜻일 텐데, 한국에서의 공연은 후자를 임의로 바꿔버림으로써 원작이 누린 찬사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원작 공연에서 가장 주목 받은 것은 이 작품의 작가이자 배우로 연기한 제시카 딕키Jessica Dickey였다. 그런데 배우가 극작을 했다는 점, 뉴스 기사에서 영감을 얻어 상상력으로 사건과 인물을 재구성했다는 사실에 대한 찬사보다도 중요한 것은 딕키가 모든 배역을 혼자서 연기했다는 점이다. 
 
만약 이 작품이 (원작에서처럼) 모노드라마로 공연된다면, 배우를 통해 트랜스포머의 현존을 즐길 수 있음은 물론이요, 가해자, 피해자, 그리고 가해자의 부인, 피해자의 아버지 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배우 한 사람 안에서 만나고 부딪힘으로써 발생하는 긴장과 아이러니 또한 맛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신촌연극제에서는 각 인물을 일곱 명의 배우를 통해 구현함으로써 각각이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 초점이 불분명해졌다. 또한 원작 희곡에서는 본래 한 사람이 여러 인물의 일부를 필요에 따라 모방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것을 그대로 배우 각각에게 옮겨 오다 보니 그들 인물에 있어서 그려지지 않고 넘어갔던 공백이 노출되고 만다. (물론 제작과정에서 이 점이 드러났다 하더라도 원작자의 희곡을 일개 사용권자가 임의로 바꿀 수는 없는 게 저작권법의 냉혹한 현실이다. 현재 미국에서는 원작자가 복수의 배우가 출연하는 작품으로 재공연을 준비중이라는데, 그들의 '유연한 개작'은 한편으로 부럽고 또 얄밉다.) 
 
무대나 의상 또한 더 많아 져서 더 손해 본 경우에 속한다. 미국 공연에서는 작은 무대에 간단한 창문틀 세 개를 삼면에 걸어 놓고, 바닥에는 나무 의자 하나를 놓았다. 또한 배우는 시종일관 아미쉬 여인들의 전통적인 복장을 한 채 모든 배역을 연기한다. 반면 한국 공연에서는 배경을 이루는 수직의 구조물에 여러 개의 문과 출입구를 만들었고, 뒤쪽 벽면 위로는 CNN 뉴스 장면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또한 무대 중앙 바닥을 아래로 파서 피해자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따로 만들고 꽃 장식을 더하였다. 의자는 철제로 만들어 필요한 수만큼 배치하였고, 에디(살인범)를 위한 카트를 비롯하여 때로는 TV 장으로, 때로는 마트의 계산대로 사용되는 도구도 별도로 만들었다. 그러나 많은 배우들이 가지각색의 의상을 차려 입고 문을 통해 쉴 새 없이 드나들고, 소도구들을 이리저리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러할 때마다, 그러한 것들로 무대가 채워지지 않는다는 점을 더 부각시킬 뿐이었다. 무조건 미국의 방식이 더 훌륭하다는 사대주의적 발상은 경계해야겠지만, 적어도 이 공연에서는 아미쉬인들에게 절제의 미덕을 배울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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