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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구보씨의 귀환: 성기웅 구성/연출,《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스테레오 2010. 12. 10. 01:05


당초 
"다큐멘터리 같은 공연"을 구상하면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는 연출의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자료의 힘이 느껴지는 공연이며, 또한 그것을 관객에게 친절히 베풀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물론 구보, 또는 이상의 팬이라든지, 한국현대문학 전공자라면 장면 사이사이의 보충 설명들이 군더더기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에겐 이러한 코멘터리는 장면전환을 더없이 유익하게 보낼 수 있는 방편일 것이다. 이제 자막 없는 TV를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우리는 브레히트적 요소에 익숙해졌다.  


다원 연극이라는
이 공연의 성격은 2부 보다는 1부에서 보다 충실하게 구현되고 있다. 2부에서도 영상이 주는 재미를 누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 상태에 대해 굳이 균형이 맞지 않다고 문제삼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구보의 원작 소설 자체가 후반부로 진행되면서 전반부와는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간의 차이이기도 하고 (각각의 시간에 따른) 공간의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후반부에서는 전반부에서 유지되던 일말의 유쾌함이 지속되기 어려워 보인다.  


박태원이 선택한
이 소설의 결말은 어떠한가. 집을 떠나 서울을 배회하던 구보씨는 끝내 집으로 가는 것을 택한다. 이럴 바에야 왜 집에서 나왔던가라고 허탈해 하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그 허탈감은 두 시간 남짓 공연이 아니라 한 달 以上 신문에 연재된 소설로 구보씨를 만난 당시 독자들이 더 크게 느꼈을 법도 하다. 그러한 마음을 짐작했는지 작품 속 李箱은 구보 씨가 벗과 헤어진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결말을 제시해본다. 그러나 호메로스가 오뒤세우스로 전례를 삼은 이래로 집 나온 남자는 응당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결말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율리시스』가 언급되는 순간, 박태원의 선택은 정당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콤마는,
원작 소설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그 콤마는, 글로 읽을 때에야 온전히 기능하는 것 같다. 내 속의 낭독자는 글로 읽을 때 공연에서 보다는 좀더 간격을 두고 쉼표를 지나갔었다. ','가 있는 자리를 진짜 /콤마/로 채워 넣음으로써 공감각적 효과를 만들어 낸 것은 분명하지만, 콤마는 역시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작동해야 진짜 쉼표의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다.


공연을 보기 며칠 전에
연출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공연의 컨셉을 듣고 몇해 전 LG아트센터에서 공연했었던 카마 긴까스의 《검은 수사》가 생각난다고 했더니, 그렇지 않아도 그 때 그 작품을 보았으며 거기서 일정부분 영감을 얻은 것이 맞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그 당시 러시아어 공연에 통역기가 제공되었었는데, 자막이나 통역기가 자주 그러하듯이, 무대와 싱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었다. 연출은 그 때 그 어색한 '동시 통역'을 들으며 텍스트와 연기의 불일치가 의외의 재미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럼, 그 때, 나는, 무엇 했었나. 고백하건대 나는 그 당시 허공에 떠 있던 무대에 압도되어 대사 같은 건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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