客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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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보편적인 '사랑' 노래 《LOVE ver. 2010》

스테레오 2010. 9. 18. 02:06

작년에 본 《로미오와 줄리엣》의 출발점 중 하나가 셰익스피어라면 나머지 하나는 바로 오늘 본 《LOVE》였다. 오늘 본 공연이 1년 전 작품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와 같은 모순적 표현이 가능한 것은 1) 이번 공연이 이미 《로/줄》보다 먼저 제작된 《LOVE》시리즈의 2010년 버전이기 때문이고, 2) 나로서는 《LOVE》 시리즈를 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로/줄》을 보았고, 오늘에야 비로소 그 선후관계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순서 때문인지 《L. v. 10》는 나에게 《로/줄》의 데자뷰 같은 느낌이었다. 보는 내내 작년 드라마센터에서의 공연에서 인상 깊었던 것들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그동안 잠시 잊고 있었던 장면을 새롭게 해주었다. 뭔가 새로운 것을 기대했더라면 실망했을지도 모를 만큼 많은 부분이 반복되었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텍스트가 없다는 것, 극장이 바뀌면서 무대가 커지고 객석 배치가 달라졌다는 점이 중요한 차이이다. 그러나 두 공연의 차이는 그저 사용된 음악이 카라의 "미스터"에서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 (일본어 버전) 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을 만큼 두 작품은 아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나의 지각은 《로/줄》이 《L. v. 10》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고 싶은데, 객관적으로는 그 영향관계를 반대로 말해야 한다는 점이다. 프로그램에서는 "《LOVE》가 《로/줄》의 밑바탕이 된다"고 명쾌하게 밝히고지만, 그러나 나의 주관은 이 글을 보고도 완전히 승복하지는 못한다. 적어도 《로/줄》에 배우와 스탭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이 《L. v.10》에 다시 참여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번 공연이 분명 《로/줄》에서 영향 받은 부분이 분명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내가 이렇게 헤매는 이유는 제목에 붙은 저 숫자[2010] 때문인 것 같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길래 2010년 버전이라는 제목이 붙고 "업그레이드"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부제가 "2010년형 사랑은 절망과 고독이 함께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그게 어디 2010년에만 그러하냐 말이다. 적어도 자유연애를 하는 언제 어디서고 사랑 때문에 웃고 울고 싸움이 나지 않은 적이 없을 것이다. 부제만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나는 다음과 같이 일련의 명제들을 종합해보고 다시금 앞서 내 주장을 철회할 수 없게 된다. 

* 《L》(또는 《L. v. 200#》)은 《로/줄》의 밑바탕이다. 
* 《L. v. 2010》은 《L. v. 200#》의 업그레이드이다. 
* 《L. v. 2010》은 《로/줄》과 거의 동일하다. 

업그레이드란 양자간의 현저한 차이가 있고, 후자가 전자보다 발전된 측면을 가질 때 사용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L. v. 200#》과 《L. v. 2010》 사이에 《로/줄》이 놓여 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 《L. v. 2010》의 업그레이드에는 《로/줄》의 영향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물론 이 문제는 이전 버전들을 비디오 자료로라도 확인해서 풀 문제이지 논증으로 해결할 문제는 분명 아니다. 그러나 내가 괜한 트집을 잡는 것은 아니다. 공연을 보면서 나는 《로/줄》이 《L. v. 10》보다 더 완성된 작품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더 나아가 《L. v. 10》은 《로/줄》을 위한 실험이었구나라는 생각도 했었다. 셰익스피어의 이야기가 들어가게 되면 배우들의 움직임에서 더 복잡한 기호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비록 이 희곡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을 때 가능하겠으나) 관객은 배우들의 움직임을 보는 것 뿐만 그 너머에서 공명되는 문학적 요소들을 발견함으로써 입체적인 재미를 느낀다. 또한 언어를 통한 재현이 아니라 몸을 통한 희곡의 재현이라는 점에서는 메타 연극적인 재미를 맛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리 그 강도가 강하다고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지적인 유희일 뿐이다. 《L. v. 10》는 셰익스피어의 텍스트 없이도 사랑에 대해서 (입이 아닌 몸으로) 말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원전 텍스트의 존재는 지적인 재미일 수 있지만, 동시에 감상자를 억압하고 제한하는 틀로 작용할 수도 있다. 지금 무대에서는 내가 처한 사랑의 위기가 다뤄지고 있는데, 나는 남[로미오와 줄리엣]의 얘기로 치부하고, 그저 텍스트와 몸의 상호치환을 발견하면서 즐거워라 하고 있다면 그건 얼마나 한심하고도 슬픈 일이겠는가? 이 작품은 지금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아니라 바로 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임을 지속적으로 상기 시켜준다. 시종일관 무대 스크린에 투영된 LOVE라는 글자는 그것이 해석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압박에 가까울 정도로 강조한다. 보편적이란 것이 구체적인 "시간도 장소도 ... 기억나지"  않지만 수긍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말한다면, 《L. v. 10》는 《로/줄》의 특정한 상황을 제거함으로써 보편적인 노래가 될 수 있었다. 

이처럼 《로/줄》과 《L. v. 10》은 관점에 따라 일장일단이 있는 작품들이다. 동일한 대상을 하나는 구체적으로 다른 하나는 추상적으로 그렸다. 둘 중 하나의 우위를 말하다가는 그만 범주의 오류에 빠질지도 모를 일이다. (9월 19일까지 혜화동 원더스페이스 동그라미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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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로/줄》이 어쨌다는 건가 궁금하신 분은 다음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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