客記

창조적인 일과 잡스러운 일 본문

잡생각

창조적인 일과 잡스러운 일

스테레오 2022. 8. 23. 12:29

서양 사상과 문화의 기반이 되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예술은 뛰어난 철학자와 예술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그 뒤에서 그들을 위해 봉사하던 노예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사상 가장 늦은 시점까지 노비를 두고 있었다는 우리 전통 사회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현재도 제도는 사라졌어도 계급이 실질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만큼 창조적인 활동을 하는 '자유인'과, 창조적 활동을 양보하고 '자유인'의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을 다 담당해주는 '도우미'의 구분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여전하다. 

문제는 창조적인 활동과 더불어 일상의 지리멸렬한 일들을 모두 감당해야 하는 '보통'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잡일과 창조적인 일이 함께 주어진다. 

아니 어쩌면 두 가지는 구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예술 활동만이 창조적인 일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화가에게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창조적인 일이요, 빨래, 청소, 설겆이 등의 집안일이 잡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물론 우선순위가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와 같이 이분법적인 구분을 가지고 있으면, 잡일을 하는 동안에는 자신이 계속 소진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결국 이러한 피해의식은 창조적인 일을 하는 데에도 방해가 될 뿐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일을 자신의 본업, 혹은 우선적인 창조 활동이라 생각한다면, 잡일을 가급적 안 하려고 할 게 아니라 창조 활동에 도움이 되는 방식을 찾아 할 필요가 있겠다.   

가령 집안일 역시 집안의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로 인식하거나, 혹은 본업을 하는 동안 지쳐버린 정신을 회복하기 위한 느슨하고 단순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예술가는 자신의 창조적 에너지를 특정 분야에 집중하고 싶은 사람이지만, 거기에'만' 그 에너지를 쏟겠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하기도 하고 그다지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다. 특히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함께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창조적 에너지가 별반 소용이 없기에 작품 활동도 지지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여기서도 엘리자베스 길버트가 <빅 매직>에서 했던 말을 다시 되새길 필요가 있다. 예술가는 자신의 재능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모든 일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작가라면 글쓰기로 먹고 사는 게 아니라 내 글쓰기를 내가 먹여 살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