客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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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다른 두 “오이디푸스”

스테레오 2011. 3. 12. 01:34


1. 국립극단 <오이디푸스>

국립극단이 <오이디푸스>를 선보이고 한 달여가 지났다. 작품에 대한 찬사가 주도적인 가운데 비판적인 목소리도 적지 않다. 잘 봤다는 사람들의 경우 희랍 비극의 대표작을 화려한 무대와 이름 있는 배우들의 연기로 구경할 수 있었다는 경험 자체에 만족하는 것 같다. 반면 불만족스러웠던 사람들은 소문난 잔치에서 마땅히 먹을 것을 찾지 못한 욕구 불만을 토로한다. 
 
나는 이 양 갈래의 반응 중 후자에 가까우며, 이번 공연의 문제가 작품을 풀어가는 방향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관객들이 불신을 중지하고 텍스트가 가진 힘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원작에 대한 각색에서부터 무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배우의 연기 전반에서 감지된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원작이 다루는 문제의 심각성, 또는 거대한 발견과 급전을 통해 발현되는 파토스를 어떻게 관객에게 전달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칭찬을 아끼지 않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도 따지고 보면 출생의 비밀, 근친상관과 같은 매우 선정적인 (그러한 의미에서는 막장 드라마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소재이지만, 우리가 오이디푸스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오이디푸스의 불행이 자신의 운명을 피하고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후에 찾아왔다는 데 있다고 본다. (물론 그렇게 무시무시한 신탁을 받았다면, 단순히 자신의 고향을 떠나는 것으로 안심할 게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 뻘로 보이는 누구라도 항상 조심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오이디푸스의 경솔함을 그의 비극적 결함이라 여기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를 놓고 누군가의 인생을 너무나도 가혹하게 재단하는 것에 불과하다.) 아무튼 우리가 오이디푸스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에게 내려진 신탁이 애당초 너무나 가혹한데, 그것이 하나씩 실현되고, 또한 그것이 실현되었음을 당사자들이 목도해야 한다는 점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데 있다. 
 
그런데 이러한 부당성은 무대와 객석이 공유하고 출발해야 할 전제이지 무대에서 그 부당함을 입증하려고 해선 곤란하다. 독자나 관객은 쉽게 인물들에게 자기 마음을 허락하지도 않지만, 한번 준 마음에 대해서는 또 확실히 지키고 싶어할 만큼 충분히 똑똑하다. 부당한 대우를 받은 오이디푸스에게서 기대하는 고통의 크기가 있는데, 무대나 배우의 표현이 충분하지 않거나 동의할 수 없는 경우 그 공연은 보는 내내 불만족스럽다. 
 
사실상 오이디푸스가 겪는 고통의 크기는 일반적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 (오이디푸스 자신의 말로 표현하자면 이 작품은 “불행보다 더한 어떤 불행”을 당한 자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무대 위에서 큰 것을 큰 것 자체로 보여주려고 할 때에는 웬만해서는 성공할 수가 없다. 우리의 상상은 쉽게 극장 밖을 벗어날 수 있지만, 무대 위에서는 극장의 물리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비극과 서사시를 비교하면서 비극에서는 ‘서사시’와 달리 사건과 행위가 우리 감각기관에 직접 전달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비극에 있어서도 경이스러운 것은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서사시에 있어서는 경이스러운 것의 주된 요인인, 있음직하지 않은 것이 더 많이 허용된다. 그 까닭은 서사시에 있어서는 행위자가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헥토르를 추격하는 장면이 무대 위에서 연출된다면 우스울 것이다. — 희랍군은 발을 멈추고 서서 그를 추격하지 않고, 아킬레우스는 그들에게 참견하지 말라고 머리를 흔들고. 그러나 서사시에서는 그러한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24장)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을 충고로 이해한다면, 무대 위에서 표현할만하지 않은 것은 가급적 표현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고, 다룬다 하더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거대하고도 인상적이었던 무대로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자명하다. 비록 프로시니움 극장에서 측면에 경사면을 세워서 코러스를 위한 영역으로 사용한 점은 공간의 입체성 확보에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가파른 경사면과, 거기에 매달려 (또는 걸쳐 앉아 있는) 코러스들이 작품 전체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이 작품의 무대 디자이너(이태섭)가 바닥이나 측면을 급한 경사면으로 고안한 것은 이 작품 전체의 주제—오이디푸스가 알게 되는 끔찍한 진실과 그로 인한 몰락—와 호응하기 위한 의도임이 첫 눈에도 들어온다. 그러나 급한 경사면을 사용하는 것이 과연 몰락의 주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고 할 수 있는가? 여러 사람들이 지적한 것처럼 그것이 어느 정도 위태롭고, 시선의 불편을 가져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의 운명이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공연을 보는 관객들에게는 이 무대는 너무나도 감각적으로 위태로움을 표현하고 있어 (감각적 자극 특유의 적응력으로 인해) 그 느낌을 지속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더욱이 일견 가파르게 보이면서도 안전하게 공연이 가능하도록 계산된 경사면의 각도를 보고 있노라면 그 경사면은 그저 위태로움을 가장하고 있을 뿐임이 드러난다. 나에게는 무대의 경사면 각도나 그 위에서 움직이는 배우들이 본 의도와는 달리 소외효과를 발생시켰다. 물론 배우들이 위험 앞에 노출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앉아 있는 그 공간은, 그리고 (또는 그래서) 공연 전체가, 충분히 '안전'하게 느껴졌다.

오이디푸스의 행동에 있어서 원작과의 가장 큰 차이이자 논란거리는 그의 마지막 선택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 앞에서 이렇게 외친다: “신이시여, 만족하십니까? 내가 이처럼 짓밟혔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더 이상은 무자비한 신의 장난에 놀아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음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입증한다. 이 선택은 무척이나 현대적이면서도 동시에 허망하다. 현대적인 이유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하려면 원작에서 코러스의 말처럼 눈멀어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고, 그렇다면 이오카스테와 함께 목을 메면 될 일이다. 따라서 이번 각색에서처럼 오이디푸스가 두 번의 처벌을 스스로에게 가한다면 그가 스스로의 눈을 멀게 하는 (원문대로 하자면 “눈의 관절”을 치는) 행위가 참으로 무색해진다. 자주 간과되지만 원작에서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눈이 먼 상태로 다시 등장한 오이디푸스가 여전히 할 말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오이디푸스에게 발견과 급전이 찾아왔으나, 그의 삶이 아직 끝나지도, 그럴 수도 없음을 보여준다[각주:1]. 그는 자신이 태어났을 때 바로 죽었거나, 아니면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자신을 죽여주기를 바랄지언정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생각을 갖지는 않는다. 이후 대사에서는 오히려 오이디푸스가 예전의 끈기와 집요함을 회복하여 자신이 바라는 것을 크레온으로부터 모두 얻어낸다. 원작에서 오이디푸스가 두 눈을 찌르는 행위는 자신에게 더 이상 필요 없고 원하지 않는 것을 제거한 것이지, 절망 속에서 죽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 아니었다. 예언이 성취되기 위해 애써 피했으나, 그 모든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발견한 그가 무엇이 무서워 말을 아끼겠는가? 


2. 떼아뜨르 봄날 <낭만비극 오이디푸스>

떼아뜨르 봄날의 <낭만비극 오이디푸스>는 국립극단의 경우와 접근 방식이나 결과 모두에 있어서 ‘조금 많이 다른’ 공연이었다. 이 공연에서는 소위 ‘카타르시스’를 힘으로 추출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대에서 힘을 빼고 시작하니 관객도 함께 이완되어서 작품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명동예술극장과 비교한다면 소박하기 그지없는 연우소극장의) 무대 위에는 특별할 것 없는 의자 10개, 그리고 첼로와 기타가 한 대씩 놓여 있을 뿐이었다. 스펙터클 따위는 애초에 기대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무대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음과 같은 말을 기억하게 만든다: “플롯은 눈으로 보지 않고, 사건의 경과를 듣기만 하여도 그 사건에 전율과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끔 구성되어야 [한다].” (시학 14장) 
 
예상처럼 공연은 대사 위주로 진행되는데, 그것도 복잡한 수사를 빼고 줄거리의 핵심만을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배우들의 말 뿐만 아니라 동작 또한 걷기-서기-앉기라는 가장 기본적인 움직임을 벗어나지 않는다.[각주:2] 그런데 이처럼 절제된 곳에서는 약간의 차이로도 명확한 효과를 볼 수 있다. 예컨대 요점만 말하는 배우들 사이에서 애써 장황하게 말하는 테이레시아스가 두드러지는데, 그 장황함은 의외성을 가져 웃음을 유발하면서도 동시에 인물이 처한 상황으로 인해 충분히 납득할만한 예외로 다가온다. 또한 크레온이 신전에서 “돌아 오는” 장면 처리는 무대와 객석 사이의 약속만 확실하다면, 때로 예술적 표현에 있어서도 경제적인 것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원작의 이야기를 바탕 삼아 곁가지로 추가된 이야기들과 말장난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물론 이처럼 시종일관 이루어지는 희극적 이완은 이야기가 어디로 진행될지 관객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받아줄 수 일이다. 다만 이 작품은 파토스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즐기기에는 손색이 없지만, 파토스 자체는 절실히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유를 이 공연이 짧고 장난스럽다는 데에서 찾아야 할지, 관객의 불감증에서 찾아야 할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 불감증의 원인이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이제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어서 일 수도, 아니면 프로이트가 이름 붙인 컴플렉스에 대해 무의식이 너무도 완강히 저항하고 있어서 일 수도 있다. 

  1. 소포클레스 비극에서는 주인공이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내림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다시 상승하는 국면(오름세)을 보여준다는 점이 중요하다. 소포클레스의 초기작인 <아이아스>의 경우 극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내림세와 오름세로 구분되는 전형적인 양분구성의 작품이다. 오이디푸스 삼부작 또한 <오이디푸스 왕>과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놓고 보면 두 작품이 내림과 오름의 추세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2. 예외라면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의 정사 장면일 것이다. 이 장면은 “한 쌍의 사랑하는 남녀”로서의 두 사람의 주목하는 동시에 강한 극적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그것이 이번 공연에서 주목하고자 한 바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지만, 공연의 전체 성격과는 약간 동떨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차라리 이오카스테가 오이디푸스를 보면서 “귀여워”라고 말하는 부분이 간단하면서도 강력했던 것 같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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