客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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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윤정환 작·연출, 극단 산 <허튼 웃음>

스테레오 2015. 11. 5. 15:03

 역사 교과서로 하 수상한 시절에 선덕 여왕과 천명 공주를 다루는 연극 한편이 공연되고 있다. 국정화 이슈가 막 시끄러워질 무렵 나는 이 또한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 될 수 있겠다는 상상을 해보았다. 정부 주도의 획일적 역사관 주입에 대한 반발로 이를테면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같은 역사교양서들이 재조명되고 그 결과 출판계에서 역사 붐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하는 전망이었다. 하지만 국정화 고시가 이루어진 이 시점까지 인터넷 서점 베스트셀러에 신간 역사책이 전면에 배치되거나 지나간 책들이 차트를 역주행하는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고 있다. 역사라는 말만 들어도 짜증이 나기 때문일까? 역사를 소재로 한 연극을 찾아 볼 여력이 생기는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무대 양 측면으로 분할 배치된 객석은 절반 정도만 차 있었다. 

 약 5년 전 상당한 시청률을 기록했던 텔레비전 드라마 <선덕 여왕>을 즐겨본 사람들에겐 <허튼 웃음>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꽤 흥미로울 것 같다. 반면 그런 드라마가 있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거나, 선덕 여왕은 신라의 최초 여왕, 김춘추 태종무열왕은 최초의 왕이 된 진골 정도의, 다시 말해 중학교 국사 교과서 수준의 지식 밖에 없는 나 같은 관객은 여왕 자매와 용수 용춘 형제의 4각 관계를 이해하는 데 약간의 혼선이 빚어질 수도 있다. (특히 나는 초반에 용춘과 용호를 구분하는 데 꽤 애를 먹었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어느 대학 연극반이 준비 중인 연극이고, 네 배역을 맡은 배우들 또한 러브라인으로 얽혀 있어서 이야기는 더욱 복잡해진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인물 사이의 갈등이나 결말마저 겹쳐지는 내부극과 외부극의 평행구조에서 재미를 찾기 위해서는 이 복잡한 장치들을 견뎌야 한다. 내부극에서 왕실의 지엄한 분위기 속에서 경상도 억양의 대사가 구현되는 것이 적잖이 재미있었다. 그 재미에는 억양을 통해 외부극과 내부극의 결을 다르게 만든 데서 오는 연극 미학적 즐거움만이 아니라, 비록 어설플지언정 자신의 출신 지역의 말투를 무대에서 만날 때 느끼는 향수도 포함되어 있다. 내부극에 다시금 배치되어 있는 작은 연극은 <햄릿>의 극중극 “쥐덫”과 유사한 방식으로 사건 해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그런가하면 리허설 과정 및 공연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통해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것은 <한여름밤의 꿈>에서와 유사한 효과를 얻어 낸다. 

 <허튼 웃음>이 연극에 대한 성찰을 시도하는, 이른바 메타극이라는 점은 이 연극의 중심인물인 진명에 주목할 때 좀 더 잘 알 수 있다. 극중극의 작가이자 연출자인 진명은 이 연극에서 가장 애매모호한 인물이다. 아주 노골적으로 외부극과 내부극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진명이 왜 이렇게 비슷한 이야기를 쓰고 연출하고 있는지 그 동기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진명이 배우들도 납득하지 못하는 이상한 대본을 쓰고 리허설 과정에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옛 연인이었던 용호의 일시적 복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극중극중극이라는 복잡한 구조나 비극적 결말이 단순히 깨진 캠퍼스 커플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함은 아닌 것 같다. 극의 구심점으로서 인물의 심리가 드러나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진명의 속사정이 감춰져 있는 것은 아마도 이 인물이 <허튼 웃음>의 작가이자 연출자인 윤정환 자신의 페르소나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극작과 연출을 겸할 때 그는 적어도 극장 안에서는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된다. 자신의 뜻대로 인물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것은 물론, 연극 안에 또 다른 연극을 만들어 한층 더 복잡한 지배구조를 구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윤정환이 연약하고 종국에는 실패하고 마는 작/연출가를 세우는 것은 이러한 권력 구조에 대한 성찰이자 자기반성으로 보인다. 그는 이번 연극의 연출의도를 밝히며 그 첫 문장에서 “연극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시도하고 찾아보고 알아가는 과정”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번 연극에서는 그 성찰의 초점이 자신의 역할에 대한 반성에 맞춰진 것 같다. 극 속에서 배우를 죽이는 작/연출가의 소망이 그 반대편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11월 15일까지 선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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