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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헤겔렌드의 이야기에 침을 뱉는가

스테레오 2010. 5. 31. 23:47


어떤 사람에게는 이번 <로빈 후드>의 이야기('스토리', 또는 '서사구조')가 그저 "부패한 권력과 싸우다 보니 어느덧 전사로 변"했더라는 진부하고 평면적인 이야기로 보였나보다. 그러나 나는 이번 영화의 서사구조가 최소한 <글레디에이터>보다는 더 흥미진진하다고 생각한다.

탁월한 활솜씨를 지닌 한 남자가 오랜 전장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오랜 세월 비워두었던 집은 그의 '아내'가 돌보고 있으나 재산은 물론 그녀 자신의 운명도 위태로운 처지에 있으며, 오직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드디어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돌아와 스러져 가는 집을 다시 세운다.

이 이야기는 <로빈 후드> 전반부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다. (따옴표 안 내용의 진실성 여부는 잠시 접어두도록 하자.) 동시에 이 이야기는 호메로스의 <오뒤세이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는 분명 <오뒤세이아>의 인유(allusion)로서 로빈 롱스트라이드를 오뒤세우스와, 마리온을 페넬로페와의 연관성 속에서 읽어 가도록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록슬리 저택에서 기르는 강아지나, 마을에서 만나는 돼지치기는 보다 세부적인 부분에서 <오뒤세이아>를 연상시키도록 제시된 소재들이다.

그런데 <오뒤세이아>가 제아무리 역사상 최고의 서사시라 하더라도 그 이야기를 그대로 베끼고 있다면, 그런 이야기에 대해서는 "진부하고 평면적"이라고 해도 할말이 없다. 그런데 <로빈 후드>를 그렇게 비난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제 앞에서 잠시 접어둔 따옴표를 펼쳐보도록 하자. 로빈 스트라이드는 본래 록슬리 가의 영주도 아니고, 마리온의 남편도 아니다. 사자왕 리처드가 전장에서 갑작스레 죽게되었을 때 로빈은 친구들과 함께 군대를 이탈했다. 그런데 우연히 리처드의 부고를 전하기 위해 왕관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다가 프랑스 측에 사살된 록슬리 경을 만나게 되어 그는 록슬리로 가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록슬리 역할 놀이를 하던 로빈 스트라이드는 일련의 사건을 겪는 과정에서 진짜 록슬리처럼 행동하고 그는 결국 '진짜' 록슬리가 되고 만다. 이러한 방식의 이야기는 '맨' 시리즈라든지 <메트릭스> 시리즈의 제1편 (또는 프리퀄)에서 평범한 사람이 점차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과 닮아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서사구조라 할 수 있지만, 거짓된 아이덴티티가 어느 순간 진짜가 되도록 이끌고 간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할 수 있다. (이것이 독창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색, 계>에서도 이와 유사한 구조를 볼 수 있다. 2009/08/02 - [영화 리뷰] - 이안 <색, 계>)

<로빈 후드>의 시나리오 제1작가인 브라이언 헤겔렌드는 그동안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많이 써왔다. 보통 감독은 기억해도 작가 이름을 기억하지는 않으므로 여기서 잠시 그가 쓰거나 각색한 대표 작품을 열거해보도록 한다: <LA 컨피덴셜>, <컨스피러시>, <기사 윌리엄>, <블러드 워크>, <미스틱 리버>, <맨 온 파이어>. 최근 영화로는 <펄햄 123>, <그린존>. 이상의 작품만 보더라도 그는 그동안 미스테리, 또는 형사물 등의 장르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에 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기사 윌리엄> 같은 작품에서 이미 <캔터베리 이야기> 같은 고전 문학을 활용하는 방법을 보여준 바 있는데, <로빈 후드>에서도 그의 솜씨가 발휘되었다고 하겠다. 그의 이야기를 나처럼 좋아하는 것도, 또 누군가 처럼 싫어하는 것도 개인의 취향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가 평면적이고 아기자기한 맛이 부족하다고 말 할 때에는 적어도 구체적인 근거 하에 논의되는 게 마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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