客記

양과 강철의 숲 본문

양과 강철의 숲

스테레오 2017. 6. 28. 02:06

미야시타 나츠, <양과 강철의 숲>, 이소담 역, 예담, 2016. 


양과 강철의 숲이란 피아노에 대한 복합적 비유다. 일반인들에게 피아노를 소재로 접근하라 하면 대부분 나무가 먼저 떠오를 것이고 간혹 상아로 만든 건반을 생각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피아노의 구조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강철로 만든 피아노 현 정도는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양(羊)은 뭐란 말인가? 건반을 눌렀을 때 현을 때리는 망치(해머)가 펠트로 감싸져 있다는 데 답이 있다. 펠트는 울에서 왔고 울은 양에서 왔음을 알아야 비로소 양이 피아노와 연결된다. 


그렇다. 양과 강철의 숲이란 적어도 현과 해머가 있는 어쿠스틱 피아노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는 사람과, 그 건반이 해머를 통해 현을 두드릴 때 올바른 소리를 내도록 하는 조율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내가 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노동요 삼아 반복해서 듣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키보드를 두드려 만드는 문장이 피아노 건반을 통해 만들어지는 음악의 아름다움과 조금이라도 닮기를 바라는 마음 아닐까.


이 소설은 익히 알고 있는 어떤 사물을 남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는 좋은 스토리텔링의 미덕을 갖추고 있다. 그동안 일본 특유의 직업 정신, 혹은 장인(匠人) 문화는 개별 직업 하나 하나가 훌륭한 이야기 보고임을 여러차례 입증해왔다. 어쩌면 막스 베버가 요즘의 일본 소설, 영화, 만화 따위를 볼 기회가 있었다면 직업 윤리를 굳이 프로테스탄트에게만 적용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조율사들은 각각 저마다 개성을 가지고 있으나 피아노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모두가 한결같이 엄숙하다. 그들이 피아노 건반 하나에서 올바른 소리를 찾을 때 나는 쾌감을 얻는다. 그 소리가 실제로 들리는 듯 해서이기도 하거니와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언제나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일에 대한 보람과 감동이 내 문제가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나란 사람은 왜 도무라처럼 일에 대한 열정을 날마다 더 크게 하지 못하는 걸까? 내 일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 이 소설의 매력이며 그래서 이 소설을 읽어야 할 이유이지만, 동시에 이러한 순수한 열정은 소설이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잊고 스스로를 비하할 필요도 없다. 이 소설은 한편의 동화다. 우리는 일하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일하는가. 이 소설은 이런 질문에서 자유롭다. 이 소설에는 피아노 조율과 관련되지 않은 에피소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다. 당장 열정을 불태울 마음이 있어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잘 다니던 직장도 하루 아침에 매각되어 정리해고되는 일도 허다하다. 직장이 비교적 안정적이더라도 가파르게 오르는 집값을 감당하기 어렵다. 일이 전부인 삶이 개인에게 행복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삶에서 더 중요한 건 직장 밖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는 소박한 진실을 이 소설은 말하지 않는다. 


양과 강철의 숲
국내도서
저자 : 미야시타 나츠 / 이소담역
출판 : 예담 2016.12.10
상세보기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