客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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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 거래》의 천부당만부당한 교훈

스테레오 2010. 11. 17. 23:33


나는 평소에 영화를 보고 극장에서 나올 때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이야기 하는가에 귀를 기울인다. 그 때 들리는 말들에 항상 수긍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사람들의 첫인상이 비교적 여과없이 나온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정보임에는 틀림없다. 

오늘도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한 남자가 자기 일행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 영화의 교훈이 도대체 뭐야?" 
"힘있는 사람은 벌도 받지 않는다는 거지 뭐겠어..."

그동안 이런 식으로 훔쳐 들은 것 뿐만 아니라, 적어도 연극이나 영화 계통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아닌 일반인들과 같이 영화를 보게된 많은 경우에 그들의 첫번째 반응은 재미있다/없다와 함께 작품의 메시지나 교훈을 찾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교훈과 즐거움을 시가 제공해야 할 두 가지 덕목이라고 지적한 호라티우스의 시학은 우리시대에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선 부담이 될지언정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교훈을 찾으려 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다만 나는 위의 사람이 이 영화가 주는 교훈이라고 제시한 진술이 우리 사회에 대한 진술로는 일면 타당할지 몰라도 이 영화를 정확히 기술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모든 주인공은 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공식 포스터가 공정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큰 주인공 둘(최철기 형사, 주양 검사)과 그 보단 작은 주인공 하나(장석구 사장)가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공정사회'를 추구하는 대한민국에서 사라져야 마땅한 악당들이다. 비록 우리 사회는 아직 이러한 악당들이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가상의 세계인 영화 속에서는 반드시 악당은 벌을 받게 되어 있다. 장석구와 최철기에게 내려진 심판은 그러한 맥락에서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주영감이다. 앞서 무전유죄 유전무죄와 비슷한 깨달음을 얻은 그 사람이 문제 삼은 인물도 바로 이 주검사이다. 그 사람의 말처럼 주검사에게 내려진 벌은 한결 가볍다. 영화 말미에 그에게도 시련의 바람이 불어 오지만 조만간 잠잠해 질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정도에서 그친다. 그렇다면 "힘있는 사람은 벌도 받지 않는다"는 위의 사람이 지적이 타당해 보이는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당연한 소리로 들릴 수 있으나, 멜로드라마에서는 악당이 벌을 받기 전에 명백한 악행을 저질러야 한다. 그래야 관객은 그 사람이 받는 벌이 그 악행에 대한 죄값이라 여길 수 있다. 살인은 가장 확실한 악행으로 자주 사용된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영화의 결말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최형사와 주사장은 둘다 다른 인물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으나, 주검사는 이들의 죽음에 가까이 있었으나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이 영화가 제시하는 더욱 우울한 '교훈'이 있는지 모르겠다. 힘있는 자는 직접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다는 교훈 말이다. 영화를 보는 중간 중간 장면의 호흡이 예상했던 것과 잘 맞지 않아 답답한 느낌이 들었었는데, 어쩌면 그러한 호흡은 바로 이 불편한 교훈을 위해 달려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감독이여,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 이 대명한 공정사회에 어찌 이토록 천부당만부당한 교훈을 강요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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