客記

비상선언 본문

영화

비상선언

스테레오 2022. 8. 20. 15:58

나는 한재림의 영화를 징검다리 건너듯 뜨문뜨문 본 셈이지만 그동안 본 영화로도 그가 우리 시대 혹은 한국 사회에 대한 통찰을 영화에 녹여내는 재능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본 <관상>이라는 영화가 바로 그 통찰을 주제로 하고 있다. 정작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사람의 얼굴은 봤지만 시대의 모습을 보지 못했음을 한탄하지만, 한재림은 그 대사를 통해 세상 읽기의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었다. 

한재림의 세상 읽기는 <더 킹>에서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세부 내용을 떠나 검찰이 공권력의 실세로서 나라를 쥐고 흔든다는 걸 전면에 대담하게 제시한 이 영화는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극의 외양을 갖추고 있지만 실제로는 개봉 이후 한국 사회를 내다보고 있는 듯한 생각마저 들게 한다. 2017년에 이미 검사와 '王'을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재능이라는 말로도 다 설명할 수가 없다. 

<비상선언>은 국내에서는 사실상 처음 시도된 '항공 재난 영화'다. 새로운 길을 간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격려가 필요한 일이다. 게다가 이번 프로젝트가 수년 전 미국에서 나온 같은 장르의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나 십수년 전의 <플라이트 플랜> 제작비--환율이나 물가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은 단순 비교일지언정--의 1/3 수준이었음을 고려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가성비가 한국 영화 산업의 효율성에서 비롯되는지,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는 따져볼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당분간 이 가성비로 인해 넷플릭스 등의 글로벌 OTT 업계는 한국 영화를 대안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재림은 이번 영화에서도 시대의 모습에 주목하고 있으며, 항공 테러라는 그릇에 우리 시대의 풍경을 '잘' 담아냈다. 그런데 잘 담았다는 말이 반드시 상업 영화가 목표로 하는 흥행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을 기준으로 이미 200만 명 가량이 봤으니 그 숫자도 작은 건 아니지만 현재로서 이 영화는 손익분기점에 미치기 전에 극장에서 내려갈 것 같다. 나는 그 이유 또한 '시대'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감독이 2010년 즈음 기획했다고 하는데, 촬영이 시작된 2020년은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팬데믹이 이 영화의 내용을 얼마나 바꾸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바이러스, 집단 감염, 제약사, 정부의 대처, 각국의 서로 다른 입장 등등은 갈등과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적 소재로서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2022년 8월, 엔데믹 언저리에 와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확진자와 사망자가 다시 늘고 있는 시점에서 이 영화는 그저 '오락'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결말에 대한 논란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평론가 이동진은 탑승자들의 마지막 선택을 피학적인 집단주의라고 규정하고 위험한 발상이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지적 자체는 틀리지 않았지만, 영화는 탑승자들이 그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충분히 제시했으니 감독이 어떤 메시지를 강요했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난 이 장면 역시나 한국 사회의 정서를 고스란히 반영했다고 봤고, 만약 그것을 피학적인 집단주의라고 비판하려면, 그 비판의 대상은 영화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주류 정서여야 할 것 같다.

대단한 배우들을 모아놓은 데 비해 영화적 감동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내가 보기에도 이 지적은 타당했는데, 그러면서 이 시나리오가 과연 '영화'를 위해 마련된 게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영화라고 하기에는 작은 변곡점이 너무 많고, 그래서 공항을 몇번이나 옮겨 다니는 걸 끝까지 보고 있기에 숨이 가쁘다. 이런 호흡은 넷플릭스 시리즈 같은 연속극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 만약 그러했다면 각각의 분기점이 매 회차에서 다뤄지는 호흡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인물들의 에피소드도 더 자세히 들어갈 수 있었을 테니 '쟁쟁한' 배우들의 분량도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잘 읽는 사람이니 영화와 연속극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음을 한재림 감독도 이미 보고 있을 것 같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