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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살까지 못해본 남자

스테레오 2022. 8. 29. 02:07

섹스는 코미디에서 아주 중요한 소재다. 성욕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 중 하나이고, 그래서 가장 강력한 억압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의 초기부터 프로이트가 농담에 대해 다룬 이유도 바로 성욕 때문이었다. 

코미디 영화에, 특히 성인들을 위한 코미디에는 웃음 보증 수표인 섹스가 빠지기 어렵다. 그건 마치 차포 떼고 장기를 두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섹스 코미디, 즉 섹스를 중심에 놓고 하나의 코미디를 펼쳐 나가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선택이다. 어쩌면 그것은 마치 운명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는 비극 만큼이나 정면 승부에 가깝다. 

2005년 영화 <40살까지 못해본 남자>는 그런 측면에서 뻔하지만 대담한 영화다. 안 봐도 이 영화의 줄거리와 결말은 대충 짐작이 간다. 나 역시 코미디 장르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면 굳이 찾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2022년에는 넷플릭스, 혹은 지나간 영화를 볼 수 있는 편리한 도구가 있다는 것도 한 몫 했다.) 

하지만 뻔하다고 이 영화를 3류 취급하는 건 옳지 않다. 일단 이 영화에는 스티브 커렐*, 폴 러드**, 세스 로건 미국의 내로라하는 코미디 배우들이 출연한다. 조나 힐의 앳된 모습도 잠시 볼 수 있다. 2010년도 이후 최근까지 이들의 활약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들이 하나의 영화에 함께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관심을 가질만 하다. 

더불어 코미디는 결코 혁신적이거나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장르가 아니다. 인간은 자기가 모르는 무언가에 대해 결코 웃을 수 없다. 미지의 영역은 공포와 두려움이 관장하는 곳이다. 그러니 관객을 웃기려면 그들이 아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주인공 앤디의 '문제'는 웃음이 소수자에 대한 다수자의 우월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관객은 다수자의 입장에 있지 않고서는 함께 웃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웃었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는 그저 웃은 척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 영화를 보고 웃지 못하면 그 즉시 자신이 소수자의 위치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소수자에 대한 횡포인가? 어떤 점에선 그렇다. 특히 이 영화에는 현재 기준으로는 주인공 역시 포함할 수 있는 성적 소수자나 인종적 소수자에 대한 비웃음이 적지 않다. 그런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건 코미디가 가지는 기본적 특성이며, 세상 모든 코미디를 없애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을 문제다. (어쩌면 완벽하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코미디를 만든다는 과정이 하나의 코미디 소재일 수 있다.)

이 영화의 의미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코미디 영화는 말하자면 '그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서 그 사회에서 어떤 힘이 작동하고 있는지, 특히나 어떤 집단이 다수를 이루고 또 어떤 집단이 소수자의 위치에 있는지를 투명하게 드러낸다. 인간 사회가 지속되는 한 다수 집단이 소수 집단을 비웃는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흥미로운 것은 시대가 지나면 대상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코미디는 비극 보다 더 역사적이다. 이 영화가 나오고 17년이 지난 현재, 미국 영화가 성소수자나 아시아계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크게 달라졌다. 물론 웃음이라는 포식자는 언제나 자기보다 열등한 타겟을 필요로 하니 지금은 그 대상이 어디로 옮겨 갔는지에도 주목해서 볼 일이다. 

 

*스티브 커렐의 더 진지한 (코미디) 영화들도 함께 봐야 한다: 특히 애덤 맥케이와 함께 만든 <빅 쇼트>와 <바이스>. 

** 폴 러드는 앤트 맨으로 이제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1996년 바즈 루어만의 <로미오+줄리엣>에서 맡았던 파리스 역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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