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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와 유령

스테레오 2011. 6. 21. 02:11

셰익스피어와 유령[각주:1]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작품에서 혼령
, 요정, 마녀, 마술 등 초자연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혼령 또는 유령은 그 중에서도 가장 빈번하게, 또한 가장 극적으로 이용한 초자연적 요소이다. 예를 들어 <헨리61><헨리62>, <헨리8>, <맥베스> 등에서는 환영(visions)의 형태로 유령이 나타나고, <리처드3>, <줄리어스 시저>, <햄릿>, <맥베스>, <심벌린>에서는 죽은 사람의 영(spirits)이란 의미에서 혼령이 등장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빈번하게 사용된 혼령은 당시의 신앙과 문학적 전통이 만나서 이루어진 것이다. 16-7세기 영국은 마술에 대한 믿음이 가장 크게 번성하던 시기였으며, 마술과 유령에 대한 견해 또한 다양했다. 먼저 스콧(Reginald Scot)과 같은 사람은 마술의 발견(The Discoverie of Wichcraft)이라는 책을 통해 마술과 유령에 대한 생각이 미신적임을 폭로하고자 하였으나, 엘리자베스 여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제임스 1세는 직접 마술론(Daemonologie)을 저술하여 스콧의 견해를 반박하였으며, 그의 책을 불태우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령이 실재한다고 믿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유령에 대한 이해는 신교와 구교에 따라서도 차이를 보인다. 당시 대부분의 가톨릭교도들은 혼령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연옥으로부터 돌아오도록 허락받은 죽은 자의 영혼일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신교도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지상으로 되돌아 올 수 있다는 연옥설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유령은 천사이거나, 보다 더 일반적으로는, 죽은 친구나 친족의 형체로 와서 누군가를 해치려는 악령으로 여겼다.

셰익스피어는 위의 견해들 중 어느 하나를 따르기 보다는 상황에 따라 유연한 입장을 보였다. 심지어 하나의 작품 안에서도 신교와 구교의 입장을 모두 반영함으로써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면서도 유령을 보다 신비하고 애매하게 그렸다. 더 나아가 셰익스피어는 민간의 유령 이야기들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만들기도 했고(<겨울 이야기>,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 ‘유령은 햇빛을 견딜 수 없어 새벽에 수탉이 울면 사라진다와 같은 민간의 속설까지도 적극적으로 작품 속에서 활용하기도 했다(<햄릿>).

작품 속 유령의 등장은 문학 전통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혼령을 문학작품에 처음 이용한 사람은 로마의 세네카였다. 그는 자신의 극작품(<튀에스테스><아가멤논>)에서 각각 탄탈로스의 혼령과 튀에스테스의 혼령을 등장인물로 내세웠고, 이들을 복수를 위해 명부에서 귀환한 복수혼령으로 만들었다. 16세기 영국의 비극에는 이 세네카의 전통을 이어받아 복수혼령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복수를 위해, 또는 자신을 위한 복수를 지켜보기 위해 극에 등장하지만, 극중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없었고, 극의 액션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경우에는 혼령이 인물과 대화하고 직접 복수를 명하는 등 극의 액션에 개입하도록 함으로써, 유령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셰익스피어와 유령학

셰익스피어의 유령은 철학자들에게도 흥미로운 사유 거리를 안겨주었다. 슬라보예 지젝은 <햄릿>을 다루는 자리에서 부왕의 유령은 육체적 죽음을 초월하여 존속하는 상징적 부채를 청산하고자 돌아온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죽은 자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그들의 장례가 제대로 치러지지 않아 그들에게 상징적 질서 안에서의 정당한 위치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젝에게서는 홀로코스트나 소련의 강제수용소라는 사건이 오늘날 법적 소송이나 언론의 고발 등으로 계속 나타나는 것 또한 유령들이 귀환하는 하나의 형태로 여겨진다.

한편 레비나스는 셰익스피어가 존재의 의미를 탐구한 철학자로 여긴다. 그에 따르면 셰익스피어는 유령을 등장시킴으로써 존재론적 사유를 본격화 했다. 왜냐하면 유령은 존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무()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유령들은 셰익스피어의 사유가 존재와 무의 한계 위에서 부단히 움직일 수 있도록해준다.

바로 여기에 맥베스가 뱅코우의 유령을 보고 놀라는 이유가 있다. 맥베스는 자객을 시켜 뱅코우를 죽임으로써 그의 존재도, 그에게 주어진 예언도 부정하려고 했다. 그런데 뱅코우가 유령이 되어 돌아온 것은 맥베스에게 살인은 존재를 무로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믿음을 깨뜨려 버렸다. 맥베스에게 뱅코우의 유령이 곰이나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유령이 무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이지 살인보다 더 오싹한 일이다.

이처럼 레비나스의 존재론적 사유에 따르면 맥베스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악당이 된다. 물론 이 오싹한 유령 앞에서도 철학자의 눈에는 그저 철학()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문헌

윤희억. “햄릿의 유령”. 셰익스피어 비평. Vol. 34 No.1. 한국셰익스피어학회. 1998. 195-214.

이경식. “셰익스피어의 초자연적 요소(배경적 지식을 중심으로)”. 인문논총Vol. 42.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 1999. 21-58.

서동욱. “셰익스피어의 유령학”. 철학과 현실. Vol. 47. 철학문화연구소. 2000. 153-76.

 

  1. 이 글은 코끼리만보에서 제작하고 2011년 2월 11일부터 28일까지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공연한 <맥베스> 프로그램에 수록되었던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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