客記

연상호, 부산행 본문

영화

연상호, 부산행

스테레오 2016. 7. 25. 23:55

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증권사 펀드 매니저인 석우(공유)는 아내와 헤어진 후 딸 아이 수안을 키우며, 사실상 어머니에게 맡긴 채 방치하며, 살고 있다. 수안은 자신의 생일을 맞아 부산에 살고 있는 엄마를 만나러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고, 결국 석우는 아침 일찍 떠나 부산에 가서 딸을 아이 엄마에게 인계하고 돌아올 작정으로 KTX에 오른다. 열차가 떠나기 직전 한 젊은 여성이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은 채 객실에 오른다. 이 여자는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다 의식을 잃고 마는데, KTX 승무원이 응급상황에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사이 다시 깨어나 이 승무원의 목덜미를 문다. 이후 열차 안에서는 무는 사람, 물리고 다시 물려는 사람, 안물리려는 사람의 난투극이 벌어진다. 물론 열차 바깥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부산행 KTX는 동대구역에서 멈추게 되어 남은 사람들은 새로운 열차를 타고 아직은 안전하다고 알려진 부산을 향해 떠나고자 하나 기관사를 포함하여 대부분이 환승에 실패한다.


실사판 좀비물로는 첫번째 시도라는 점에서 평론가들이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홍보를 잘해서인지 무서운 속도로 관람객이 늘고 있다. 나 또한 그 숫자를 보탠 한 사람이지만, 그 전파 속도가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무서운 감염 속도와 자꾸 겹쳐진다. 좀비물을 안본 것도 아니지만 많이 본 매니아도 아니므로 장르 영화의 관습에서 이 영화의 잘됨과 안됨을 말할 자격은 되지 못한다. 하지만 도입부에서 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내가 불편해 했던 점에 대해서는 간단히 남겨둘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어쩌면 이동진처럼 후덕하게 평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아쉬움일지도 모르겠다(http://magazine2.movie.daum.net/movie/34657).


극장을 나서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감독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지금도 너무나도 구태의연한 대사나, 배우들의 어색한 대사 전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감독을 탓하고 싶다. 근래 본 한국 영화 중 이렇게까지 오글거리는 대사를 늘어놓는 경우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행히 잘 피했거나. (대사의 수위가 TV 드라마에 더 가깝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장면 곳곳에 들어 있으나 하다 만 듯한 비판 의식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감독 탓만 하고 싶지는 않다. 감독은 좀비라는 국가적 재난 앞에서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의 대응을 언급하는데, 이것이 우리의 현실을 비추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또한 개인들 역시 돈 있고 빽 있는 사람들은 이 위기를 혼자서 빠져나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음을 비꼰다. 무엇보다 좀비 무리를 뚫고 힘겹게 살아 돌아오더라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좀비 보다 더 매정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가 헬조선 지옥도를 그리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 의식은 오락 영화의 미덕을 갖추기 위해 희석되고 주변화된다. 심지어 석우가 회사 부하직원인 김대리와 통화하는 중 바이러스의 시작이 석우가 주가 조작에 가담했던 한 업체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하지만 이 엄청난 크기의 발견은 아무런 사건의 전환을 가져오지 못하기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저 작전은 옳지 못하다는 당연한 논평을 내놓는 것에 불과하다. 이로부터 석우의 죽음을 예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내와 태중의 아이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상화(마동석) 앞에서 석우의 죽음은 빛나지 못한다. (그래서 그 순간 '플래시' 백을 사용한 걸까?) 더군다나 만약 이 바이러스가 석우의 책임이라면, 그의 딸이 끝까지 살아 남는 것은 시적 정의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시적 정의보다 어린 여자와 임신부는 "살려야 한다"는 오락 영화의 문법이 더 지배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직썰에 올라온 한 리뷰는 <부산행>을 한줄로 요약하면서 "영화가 가부장제에 부역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 영화"라 평했다(http://www.ziksir.com/ziksir/view/3520). 글쓴이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기는 어렵다. 여성 캐릭터들이 하나 같이 민폐녀는 아니다. 당장 석우의 딸 수안만 하더라도 아빠에게 짐이 되기 보다 오히려 아빠를 수시로 교훈하는데, 그 방식이 상투적인 것은 비난받을 수 있을 망정, 아이가 무기력하게 울거나 패닉에 빠져 있지 않다는 점은 좋게 봐줄 수 있다. 나아가 만삭의 배를 안고 객실과 대합실, 그리고 선로를 뛰어다니는 성경(정유미) 캐릭터는 남자들이 공감하지 못할 뿐 결코 소극적인 인물이라 말할 수 없다. 물론 글쓴이가 지적하듯이 좀비와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는 인물이 하나 같이 가부장 혹은 예비 가부장이란 설정은 구태의연하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이동진도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최소한 남고 야구부가 아니라 여고 복싱부가 타고 있던 열차였어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었다. 아무튼 이 영화가 가부장적 가치를 옹호하는 것 역시 백수십억의 자본이 들어가고 그것을 회수해야 하는 제작시스템과 무관하지 않다. 어쩌면 블록버스터에서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이야기 혹은 인물을 꿈꾸는 것 자체가 허상이다. 그런 영화가 있다고 믿는 게 이미 현혹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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