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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웃는 남자 SAC on Screen

스테레오 2018. 12. 13. 02:11

지난 여름 놓쳤던 뮤지컬 <웃는남자>를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관계자의 초대를 받아 제한적 상영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연극이나 오페라를 스크린이나 화면을 통해 고화질 영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점차 늘어가고 있다. 영국의 국립극장 라이브(NT LIVE)의 레퍼토리는 남산국립중앙극장이 도맡아 상영하고 있으며,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메가박스 몇몇 곳에서 상영하고 있다. 런던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의 작품들은 DVD로나, 혹은 온라인 스트리밍으로도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영국 주요 극장의 공연 실황을 https://www.digitaltheatre.com 이란 사이트를 통해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국내에서도 몇 해 전부터 공연 영상화 사업이 추진되고 있으며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예술의전당이 이 일을 꾸준히 해오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나처럼 공연을 놓친 관객들이나 지방에 거주해서 서울 공연을 찾아 오지 못했거나 공연이 그 지역에 찾아가지 못하는 경우라도 지역 예술회관 등을 통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있다. 물론 현장성과 동시성이 빠진 공연의 기록은 생명력이 소거된 껍데기에 불과할 수도 있다. 요즘 관객들은 공연 사진이나 영상을 '박제'라고 부르곤 한다. 하지만 완전하고 온전하지 못할 지언정 공연에 뒤늦게라도 참가하고 싶은 욕구를 고려한다면 앞으로 영상화 사업은 더 활성화될 것이 자명하다. 그리고 현장을 아무리 옹호한들 예당 오페라극장 3층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영상이 훨씬 더 보기도 듣기도 좋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관람 기회를 준 관계자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공연에 대한 짧은 감상을 남긴다. 그 전에 뮤지컬이나 음악에 대해 비평을 할 수 있는 식견이나 경험을 갖추지 못했으며, 위고의 <웃는남자>도 아직 읽지 않았음을 밝힌다. 그저 드라마적인 측면에 대한 의견으로 받아주시기 바란다. 

데이빗 더리모어가 데아를 겁탈하려는 장면과 이어지는 '물장난' 장면이 나는 불편했다. 결과적으로는 미수에 그쳤다고 할 수도 있으나 무대 위에서 성폭력을 다루는 장면이 반드시 필요한지 물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야기 전개의 정당성이 충분하더라도 점점 더 많은 관객들이 이러한 장면의 무대 재현을 반대하고 있다. 사실 이어지는 장면이 더 문제적이다. 동료 여성들이 데아를 달래면서 "남자 때문에 울지마"라고 말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패닉 상태에 있던 데아는 다시금 웃음을 되찾는다. 앞선 장면에서 일어난 사건의 크기에 비해 회복이 너무 빠르다.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적절하지 않다. 장편 소설이고 내용 자체도 비약이 있는 플롯임을 감안하더라도 각색 과정에서 더 세심하게 다룰 수 있고 그래야 했던 장면이라는 점에서 향후 개선이 있기를 바란다. 

<웃는남자>는 혁명기 프랑스에서 민중을 위한 작가로 이름을 드높인 위고의 명성에 걸맞게 귀족과 민중의 갈등이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공연 또한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다."라는 문장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주인공 그윈플렌의 파란만장한 삶을 따라간다. 귀족 출신이었다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 후반부 그윈플렌은 1%들, 즉 여왕과 상원 의원들이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기들의 배만 불리려는 모습을 목격하고 그들과 함께 하길 거부한다. 귀족이라는 계급적 특권을 버리고 프랑스 혁명의 가치라 할 형제애, 혹은 박애를 실천하는 민중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주제가 가장 잘 드러나는 넘버("그 눈을 떠", "웃는 남자")가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현 시점에서 뮤지컬을 보는 관객들과 이 작품이 심정적으로 동일시하는 인물들이 계급적으로 일치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뮤지컬 관객을 대체로 부르주아 중산층이라 본다면 이들이 민중 지향적인 위고에 어느 정도 공감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소설이나, 몇 해 전 국내에서 큰 울림을 준 영화판 <레 미제라블>에 비한다면, 뮤지컬 티켓 가격은 "가난한 자"를 위한 장르라고 말하기엔 마땅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뮤지컬을 고급한 문화 생활로 즐기는 기득권자들에게 <웃는남자>가 어떤 울림을 줄 수 있었을지 궁금하다. 어쩌면 관객들 중 일부가 심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노래는 "우린 상위 1%"가 아니었을까? <웃는남자>라는 텍스트가 현재 뮤지컬 시장 지형에서 관객들에게 적합한 텍스트인지 의문이다. 부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는 뮤지컬 또한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라는 지적에서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런 측면에서 뮤지컬 <웃는남자>가 영상화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 작품에 공감할 수 있는 관객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이 또한 순진한 생각일 수 있다. '가난한 자들'이 뮤지컬을 자신들을 위한 장르라고 여길지, 이 작품이 부의 불평등이란 강고한 벽에 작은 균열이라도 가져올 수 있을지 미지수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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