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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느끼는 셰익스피어 ―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 도쿄데스락 《로미오와 줄리엣》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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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느끼는 셰익스피어 ―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 도쿄데스락 《로미오와 줄리엣》

스테레오 2009. 10. 20. 01:11

연극이란 무엇일까? 연극계에 종사하거나 이것을 공부하는 사람들조차 이 물음에 한마디로 답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이 물음에 정답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각양각처에서 수많은 모습의 연극이 있어왔고 지금도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한 마디로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하고 만다.


단 하나의 정의는 불가능하더라도 시대와 지역마다 유력한 정의들은 있어 왔다. 물론 우리 시대에는 그와 같은 주류 연극론이 있다손 치더라도 모두가 그것을 따라야 할 법적 의무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거기에 저항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극예술가들도 시대적 주류 연극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때로는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아카데미의 권위로, 또 어느 때에는 현실적 (상업적) 제약에 의해 어떤 예술가는 시대적 주류 연극론과 타협을 이루어야 한다.


절대 왕정은 사라졌으나 그 시대에 설립된 학술원은 여전히 존재한다. 연극계에도 제도적으로든지 개념상으로든지 이러한 아카데미는 남아있다. 그렇다면 과거 절대 권력을 위해 봉사하던 이들 기관은 오늘날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19세기 말엽에 등장한 유미주의 운동은 이 맥락에서 볼 때 비어 있는 왕좌에 예술이라는 새로운 절대자를 앉힌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왕을 위한 예술이 “예술”을 위한 예술로 바뀌었다. 이 때 “예술”은 엘리트 비평가 혹은 예술가 자신이 정의하는 그 무엇으로, 그 때로부터 일반 대중은 그 “예술”에 좀처럼 따라오지 못한 채 낙오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예술 혹은 취미를 수식하는 말로서 고급(high brow)과 저급(low brow)이라는 표현이 본격화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의 연극을 두 부류로 나누어 보자. 먼저 예술가 자신을 위해, 또는 비평가와 같은 엘리트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것은 예술 연극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반면 보다 많은 입장료 수익을 얻기 위해, 또는 더 많은 동시대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하는 연극은 대중극 또는 상업극이라 해도 괜찮을 것이다. 물론 이 두 부류는 배타적이지 않다. 실제 상황에서는 양자 모두에게 선택되거나 때로는 양자 모두에게 버림받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이 두 가지 연극에 대해 가르친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그 강좌의 이름을 연극개론 또는 연극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예술극과 대중극이라는 이분법보다는 보다 고전적인 연극론과 현대 연극론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더 우세한 것 같다. 이 강좌는 최소 두 학기를 필요로 한다. 1학기에 수강하게 되는 강좌를 고전반이라 한다면, 이 과정에서는 전통적인 이론들, 보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론들에 대해 공부하게 될 것이다. 2학기 과정은 고전반에서 배운 내용들을 하나하나 재검토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고전반에서 배우는 내용들을 요약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극장은 무대와 객석으로 나뉜다; 2) 연극은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특정한 이야기를 전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비극 작품은 배우를 통하지 않고 귀로 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될 수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해 연극의 중심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로우며 또한 그것이 공연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되는가 여부가 좋은 공연을 결정한다; 3) 배우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연기하지만, 관객이 그 인물을 진짜처럼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4) 관객은 이러한 인물들을 통해 연민과 공포 같은 감정을 느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객이 비극의 효과를 이러한 감정을 카타르시스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5) 관객은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허구라는 점을 알고 있지만, 적어도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그 사실성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동시에 사건이 거짓이 아니라고 믿으면서도(suspension of disbelief), 거기에 따르는 실제적 행동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죽이려고 할 때 무대 위에 뛰어 오른다든지, TV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은 배우들을 실생활에서 만났을 때 그들을 험담하거나 비난하는 일 등은 부적절한 반응으로 여겨진다. 


고전반을 이수하고 현대반에 진입하게 되면 그 동안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의해 하나씩 부정되고 새로운 대안이 모색된다: 1) 전통적인 무대-객석의 이분법은 관객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이것을 극복할 대안은 어떠한 무대-객석의 상호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는가? 2)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과연 연극의 제일차적 목표인가? 연극이 기호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라면, 책으로 이야기를 접하는 것과 극장에서 배우와 마주하는 경험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무대와 객석의 상호작용에서 기호로 환원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면 연극의 정수는 바로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3) 인물의 정서에 동화되는 감정이입적 연기는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에 지나치게 강조되어 오늘날에는 마치 그것이 연기의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수천 년의 연극사에서는 그러한 정서환기적 연기법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가면이라는 외향을 통해 인물에 접근하였고, 인도에서는 얼굴 표정과 신체 동작을 양식화하여 특정한 감정을 나타낸 전통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배우와 작품 속 인물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연기가 실패한 연기인가? 4)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는 연극은 공포와 연민의 감정이 일시에 배출되도록 해주는 관장약이 아닌가. 오히려 연극은 공포와 연민의 감정이 어디에서 발생하여 쌓여 있는지를 추적하고 그 과정에서 사회적 모순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폭로하고 관객들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


이 중 마지막 질문들은 베르톨트 브레히트나 아우구스토 보알이 관심을 가진 문제에 해당한다. 비록 이러한 문제들까지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타다 쥰노스케의 도쿄데스락과 한국의 제12언어연극연구소가 만나 함께 만든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은 나머지 세 문제들에 대해 다각도의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현대반의 한 사례로 분류될 수 있다. 


만약 고전반을 수강하는 학생이라면 이 공연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선 이 공연의 사건 서술 방식은 그다지 친절하지 못하다. 대부분의 대사가 배우들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지만, 한 배우가 여러 인물의 역할을 하고 한 인물을 열 명의 배우가 번갈아 가며 연기하기 때문에 희곡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지 않은 이상 머리 속에 스토리라인을 선명하게 그리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문학을 중심으로 드라마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이 공연이 그다지 달갑지 않을 수 있다. 타다 쥰노스케는 셰익스피어 특유의 미사여구를 존중하는 듯하면서도 조롱하는 듯한 대사 전략을 택하고 있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대사를 그대로 사용하되, 배우들은 그에 수반되는 장치들 ― 어조, 억양, 감정 등 ― 을 배제한 채 대사를 그저 또박또박 암기할 뿐이다. 줄리엣의 첫 대사를 (도무지 줄리엣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운) 한 남자 배우에게 맡겨 관객들의 선입견을 무참히 깨뜨린다. 또한 억양을 가미하되 평서문이든 명령문이든 모든 대사의 끝을 의문문처럼 올려 말하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그것을 왜곡시킨다. 게다가 이번 공연에 참여한 일본 배우인 사야마 이즈미는 자기 차례에 자신의 모국어로 대사를 하는데, (필자를 비롯한 다수 관객뿐만 아니라) 상대역 또한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대사 전략이 이렇게도 불친절하게 구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장면에서 관객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였다는 사실은 연출가가 기대한 예상 관객이나 이날 실제로 방문한 관객이 상당부분 현대반 학생들이었음을 가늠하게 해준다.


무대와 객석의 배치를 보자. 이번 공연에서 관객들은 남산“예술”센터의 반원형 객석을 텅 빈 채로 두고 무대 양쪽 구석에 준비된 간이 의자에 앉았다. 그 사이에 설치된 배우들의 공간에는 매트 위에 흰색 천을 깐 다음 다다미 폭 정도의 간격으로 테이프를 붙여 마감한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흰색 바닥은 청색과 적색의 조명을 통해 다양하게 변화하지만 이러한 무대 미술은 특정 장소를 지시하기 보다는 분위기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다소 모던하다.


미술보다는 음향이 더욱 흥미롭다. 2009년 공연에 맞추어 이번 공연에는 카라를 비롯하여 요즘 대한민국 가요계를 주름잡는 걸 그룹들이 나이팅게일 역할을 맡았다. 그에 따라 무대 역시 나이트클럽을 연상케 한다. 사이키 불빛 아래 무대 전면에 배치된 대형 스피커의 볼륨이 점차 커져간다. 그 소리는 일반적인 배경 음악으로서의 수준은 물론 듣기 좋을 수준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 쩌렁쩌렁한 소리는 관객의 고막을 넘어서 객석 의자와 바닥에 진동으로 변화되어 온몸으로 전달된다. 관객은 그 노래의 제목이 카라의 “미스터Mister”라든지 그 노래 가사가 이 공연에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는지를 생각하기 이전에 소리의 물성을 몸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 받는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배우가 등장하기 이전에 전달되는 스피커의 이 같은 퍼포먼스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번 공연은 셰익스피어의 텍스트를 단순히 연극적 기호로 치환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신체가 기호화된다는 것이 가진 의미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을 예감하게 해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타다 쥰노스케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존중하면서 진행된다. 아마도 오늘날 로미오와 줄리엣은 지상 최고의 연인으로 손꼽힐 테지만, 셰익스피어가 구성한 극본에서 이들의 사랑은 수많은 고통과 좌절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한다. 타다 쥰노스케는 이 고통의 사연을 실감나게 전달하는 한 방식으로 배우들의 몸이 고통을 겪도록 하고 관객들은 그 현장을 지켜보는 전략을 구사한다. 무채색의 옷을 입고 거의 쌩얼 차림을 한 다섯 여자와 다섯 남자는 차례 차례 등장하여 지칠 때까지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기도 하고, 서로 치고 박는 육탄전을 펼치면서 몬태규와 캐플릿의 반목을 보여준다. 배우들은 무대를 수없이 달리고 달리면서 자신의 에너지를 소진시킨다. 그리곤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에 쓰러진다. 잔혹하지만 엽기적이지는 않다. 고전반 연극이라면 피가 튈 수도 있는 장면인 결투 대목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에 담아 유쾌하게 풀어낸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여자 배우 둘을 업고 전진해야 했던 그 남자배우에게는 이것이 결코 유쾌한 장면이 될 수 없다. 이 공연이 장기 공연될 수 없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이번 작품은 배우와 인물간의 일대일 대응을 파괴하고 정서를 환기하는 연기가 아닌 몸의 고통으로 인물의 고통에 참여하는 연기, 기호를 해석하는 이성이 아니라 강렬한 소리에 온몸이 흔들리듯 온몸으로 반응하게 하는 연극, 배우가 내뱉는 대사가 아니라 그들이 흘리는 땀과 그들이 몰아쉬는 숨소리에 마음이 움직이도록 하는 공연이다. 이번 공연이 <뉴웨이브 공연예술축제 2009 페스티벌 場>의 일부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축제 전체와 다른 공연과의 관계 속에서 조망해보는 과제가 남아있겠으나, 타다 준노스케의 해석과 배우들의 움직임 그 자체는 분명 흥미롭고도 ‘교육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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