客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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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스테레오 2022. 8. 17. 01:18

사실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지만, 이야기가 새로울 건 없었다.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장기 기증에 대한 이야기는 ‘슬의생’이나 ‘유퀴즈’에서도 다루었을 만큼 ‘흔한’ 이야기지 않은가. 하지만 흔하다는 말은 필멸의 인간이 이 주제에 대해 감히 붙일 수 있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더군다나 이 사건에 관여한 사람들 각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아주 넓은 스펙트럼의 감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보편적인’ 이야기가 가진 힘이 있었다. 


공연을 보면서 내가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어떤 대사 때문이었다. 정확하지 않지만 기억에 남아 있는 대로 옮겨 본다.     

“환자 누구라도 자신에게 적합한 장기를 기증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환자의 권리라면, 논리적으로 볼 때 우리 모두에게는 장기를 기증할 의무도 있다.”

나는 이 논리에 반박할 수 없었고, 그래서인지 연극을 보고 몇일이 지나도록 머리 속에 계속 머물러 있다. 장기 기증은 특히 그것을 결정하는 가족에게는 감정적으로 너무나도 힘든 일이기에 논리로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평소에 이 논리를 접하고 수긍하는 사람은 미리 기증 의사를 밝혀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공연은 배우 한 사람이 기증하는 사람부터 받는 사람, 그 과정에 관여하는 수많은 사람에 대해 서술하고 또 연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김신록 배우의 회차를 봐서인지 공연을 보는 내내 신록 배우의 이전 작업들과 겹침이 느껴져 내심 반가웠다. 1인 서술자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에서는 <김신록에 뫼르소>가, 공연 초반 책상 위에서 시몽 랭브르의 서핑하는 모습을 연기하는 모습에서는 <비평가>의 스카르파가 많이 생각났다. 하나의 사건에 관여하는 여러 인물을 그들의 시점으로 서술해나가는 방식은 김신록 배우가 출연했던 <이제 내 이야기는 끝났으니 어서 모두 그의 집으로 가보세요>가 생각났다. (이 연극의 원작인  아모스 오즈의 소설 <친구 사이>는 이스라엘의 공동체 키부츠를 배경으로 하는데, 챕터마다 그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점을 달리하며 소개된다. 얼마 전 종영한 <우리들의 블루스>의 키부츠 버전이라 생각해도 좋다.) 

 

빛과 영상을 이용한 시각 효과가 꽤 인상적이었다. 무대 뒤편을 영상으로 채우는 방식이 더 이상 새로울 건 없지만 세심하게 고른 이미지들은 이야기에 힘을 실어 주었다. 특히 마지막 심장 수술 부분에 사용된 영상은 감동이 있었다. 무빙라이트를 적극 활용한 조명도 흥미로웠다. 조명을 이용해 벽면과 바닥에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잦은 장면 전환이 지루하지 않고 생동감있게 느껴지도록 했다. 하지만 보는 사람에게 흥미로운 이 방식이 정작 배우에게는 눈이 부셔서 고역이었을 것 같다. 

 

최근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일이 더 많아진 김신록 배우를 무대 위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배우의 육성보다 중간중간 삽입된 녹음 목소리가 어쩐지 더 흥미로왔다. 무대 먼 곳 한 귀퉁이 앉아서 소리가 멀게 들린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마이크를 통해 배우의 섬세하고도 다양한 목소리 결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나는 무대에서 마이크를 이용하면 잃게 되는 것들, 특히 소리의 지향성이 사라지고 좌우 스피커에서 소리가 나오는 문제 때문에 육성을 선호하는 편이었는데, 이번 공연을 통해 그 생각이 조금은 바뀔 것 같다. 육성이든 전기로 증폭된 소리든 배우가 내는 다양한 소리를 최대한 들을 수 있다면 관객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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