客記

스즈키 타다시, <엘렉트라>, 2008년 10월 11일 토요일, 아르코 대극장 본문

공연

스즈키 타다시, <엘렉트라>, 2008년 10월 11일 토요일, 아르코 대극장

스테레오 2008. 10. 12. 15:17

스즈키의 <엘렉트라>와 문화상호주의

셰크너(Richard Schechner)는 스즈키 타다시를 문화상호적(intercultural) 연극의 대표 주자로 거론한 바 있는데(2006: 306), 이번 작품의 경우 그 구성원만으로도 스즈키의 '문화상호주의'의 이념을 되새기게 해준다: 소포클레스의 원작(고대 아테나이)을 오페라용 리브레토로 각색한 호프만슈탈의 텍스트(오스트리아); 연출과 음악(타카다 미도리)을 비롯한 미술, 조명, 의상, 음향 등의 제반 스텝들(일본); 그리고 한국의 배우들. 여기에 변유정과 번갈아 가며 엘렉트라 역할을 맡은 러시아 배우 나나 타찌시빌리를 더하고, 아르코 대극장의 프로시니움 무대의 뿌리를 서양에서 찾는다면 거론될 나라는 더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만국박람회가 아닌 이상 열거되는 나라가 많은 것만으로 문화상호주의에 충실한 작품이라 말할 수는 없으리라. 이번 공연에 참여한 문화를 크게 유럽, 일본, 한국 이 세 문화권으로 구분하여 본다면, (남부 유럽에서 러시아까지가 하나의 문화로 매도당하는 것보다 더욱) 억울한 일은 아마도 이번 공연을 기획하고 주최한 한국의 문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위의 언급된 나라들이 모두 동서양에서 공연예술의 강국으로서 그 역사가 깊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한국이 그들 나라와 이름을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누군가는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과연 이번 공연에서 한국어로 대사가 이루어진 것 이외의 어떠한 한국적 문화를 찾을 수 있는가? 이번 공연에는 유럽과 일본의 문화 교류(cultural exchange)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한국이 이들과 동등한 문화상호적 교류를 이루어 냈는지는 의심스럽다. 수개월간 토가 연극촌에서 훈련하고 돌아왔다는 우리의 배우들은 과연 문화상호주의에 적극 참여한 한국측 대표자들이었던가, 아니면 그곳에 단지 잠시 스즈키식 기술을 익히러 잠시 파견되었을 뿐인가. 돌이켜보건데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떠나기에 무언가 아쉬웠던 그 기분이 단지 짧은 공연 시간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스즈키 타다시를 연극적 내쇼널리즘에 의존한다고 비판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이번 공연에서 일본적인 특성을 찾는 것 또한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 첫번째 특성을 본 공연이 소포클레스가 아니라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의 텍스트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호프만슈탈의 엘렉트라는 소포클레스의 원작을 토대로 오페라를 위한 리브레토로 각색된 텍스트이다. 스즈키 타다시가 고대의 세 비극작가 모두가 다룬 엘렉트라의 복수극을 하필이면 호프만슈탈의 텍스트를 통해 공연하고 있는 것만으로 '역시나(やはり) 축소지향적 일본인이로군'하고 생각한다면 너무 성급한 판단일까. 제아미(世阿彌)는 후시카텐(風姿花傳)에서 "비밀스러우면 꽃이 된다(秘すれば花なり)"고 하였다. 페터 슈타인(Peter Stein)이 연출하고 2007년 해오름극장 무대에도 올랐던 엘렉트라는 1,500행이 넘는 소포클레스의 대사를 거의 모두 사용하기 위해 120분의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반면 스즈키의 경우 호프만슈탈의 리브레토를 다시금 압축하여 공연 프로그램 맨 뒤 세 페이지에 다 수록되는 대본을 가지고 공연을 펼쳤다. 그 70분의 시간도 처음과 끝부분의 얼마간은 대사 없이 진행되었다는 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면 생략된 텍스트는 절반 이상이라 할 수 있다. 아이기스토스의 이름은 두번 언급될 뿐, 그는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오레스테스와 항상 함께 해온 퓔라데스는 (오레스테스의 휠체어를 끌어주던 간호사로 변신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존재감이 없어졌다. 오레스테스가 죽었다고 거짓 소문을 퍼트리는 가정교사는 두 사람이 되어 크리소테미스의 입으로 전달된다. (소포클레스의 크리소테미스는 오레스테스가 살았다는 '증거'를 가지고 다시 등장한다는 점과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바로 앞에서 죽었다고 전달된 오레스테스가 등장하더니 복수를 앞두고 잠시 주저하고는(이 부분은 에우리피데스를 따르고 있다), 들어가 어머니를 살해한다. 희랍 신화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리둥절 할 만큼 그 전개가 빠르고 압축적이다.


한편, 이와같은 현저한 압축적 구성에 유독 확장된 대목이 있다는 점이 주목을 요한다. 그것은 바로 엘렉트라의 "한번 더(Triff noch einmal!)"라는 대사로, 호프만슈탈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작품에서 단 한번 등장하는 이 대사를 스즈키는 세 번 말하게 만들어 놓았다. 소포클레스가 변호한 엘렉트라의 복수에 관한 정당성은 엘렉트라의 외침과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비명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 배우들이 차례차례 무대를 돌아 나가고 나면 무대에는 타다카 미도리와 '목적이 살인을 정당화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


희랍의 신화를 사용하되, 그것을 친절히 설명하기 보다는 이미 신화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장면 장면에서 지각할 수 있도록 장면을 압축적이고 모호하게 구성하는 방식, 이것이야 말로 '히스레바 하나나리'의 방식이며, 이를 통해 '꽃'을 발견하는 것이야 말로, 이어령 교수가 지적한대로 축소지향의 일본인들이 사랑하는 방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만큼 일본적이라 할 이 과정에서 희랍극의 중요한 형식적 요소들은 해체되고, 희랍의 신화는 도전을 받는다. 그러나 신화도 희랍비극도 잘 알지 못하는 한국의 일반 관객은 소외된다. 여러 손님들을 끌어모았지만, 이래서는 일본인들만의 이치자콘류(一座建立)일 뿐이다.


코러스라고 되어 있는 다섯 남자는, 시작과 함께 등장하여 '이것이 과연(なるほど) 스즈키 메소드로군' 할 만한 발 놀림의 진수를 보여준다. 휠체어란 다리를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비에 교수(Prof. Xavier)의 탁월한 정신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이 바로 그의 휠체어에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공연에서는 이 도구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 있으므로 신체의 다른 부분은 부동자세가 유지된 채 다리를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노나 교겐에서 볼수 있는 세심한 발디딤으로 천천히 타다카 미도리와 그녀의 악기 주변을 수차례 돌고 난 코러스들은, 그녀의 음악 장단과 함께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굴려가며 무대 뒤편 좌우를 이동한다. 그들이 빠른 발놀림으로 휠체어를 밀면서 뱅글뱅글 돌 때(이 지점에서 그들에게는 휠체어가 '다른' 목적을 위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무대 바닥의 돌아가지 않는 회전무대가 그 흔적만을 남기고 있던 것은 그만큼 발의 문법이 강조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이들의 주된 역할은 엘렉트라의 입이 되어 그녀의 대사를 대신 읊어주는 데 있기에, 이들은 진정한 의미의 코러스가 아니라 복수의 프로타고니스트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로써 무대는 (대사는 거의 없이 상징적 동작을 되풀이하는) 연기자, 그리고 악사와 낭송자의 형국이 되어 버린다. 노, 가부키, 조루리 등의 일본 전통예능의 형식을 꼭 닮아있는 것이다. 희랍극의 소재를 가져오되 그 형식적 특성은 대부분 배제되고 일본적 공연이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문화상호주의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희랍과 일본 사이의 싸움이 어떻게 전개되든지 간에 그안에서 한국적인 무언가를 찾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배우들의 대사가 건조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 희랍의 소재에 형식은 일본식이니 한국 관객이 감흥이 잘 될 턱이 없다. 물론 나부터 이 공연에서 뭔가 감동을 받아보고자 극장을 찾은 것이라기 보다는 그동안 전해들은 명성에 반응한 것이지만 말이다. 다만 이러한 방식이라면 차라리 일본인들에 의한 일본 공연을 자막과 프로그램의 대본을 의지해 관람하는 것이 이같은 애매한 기분에 사로잡히지 않는 비결이 아니었을까. 그러했다면 이 공연을 동양과 서양이 형식과 소재라는 검으로 겨누어 보는 한판 승부라고 봐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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