客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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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침묵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시쓰기: 이창동,《시》

스테레오 2010. 11. 20. 23:27


 

"시를 쓰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시를 쓰려는 마음을 갖는 게 어려워요."


미자의 시 선생님 김용'탁'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은 마지막 수업시간에 숙제를 해 오지 않은 학생들을 꾸중하다가 나온 말이다. 그런데 선생님 본인처럼 시를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시를 쓰려는 마음'을 갖는 게 어디 쉬운 일이랴. 미자는 영화 내내 시를 쓰려고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좌절한다. 그리고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되풀이한다. 선생님의 말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미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시를 쓰려는 마음'이 갖춰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만 놓고 볼 때 그 마음은 미자에게 아주 치명적이었다. 미자는 "자신의 종말이 막을 수 없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때 비로소 시를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미자의 시를 쓰려는 마음은 하우저A. HAUSER가 말하는 "비극적 생활감정"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시》는 비극이라 부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미자는 왜 시를 쓰려고 하는 것일까? 감독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이 작품에서 제기되는 정반대 질문과 함께 풀어볼 것을 제안한다. 기범 아버지를 통해 두 번씩이나 제기되는 그 문제는 바로 ‘왜 미자는 외손자의 엄마, 즉 딸에게 이 문제를 말하지 않는가’이다.  감독은 이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미자가 말하지 않는 그 행위 자체에서 관객이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딸의 모습을 잠깐 동안 스크린에 보여줌으로써 딸의 형편은 관객이 짐작한 대로임을 넌지시 말하고 만다. 물론 현실 상황에서 어떤 할머니가, 또는 내 엄마가 이렇게 행동한다면 참으로 답답한 노릇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미자가 왜 그 문제를 자신이 직접 해결하고자 했는지 웬만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할 수 없음은 예컨대 《대장금》에서 장금이가 번번이 말하지 않음으로써 곤경에 빠지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가장 큰 차이는 장금이의 경우 그 자리에서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누명을 뒤집어쓰지만, 궁극적으로는 누명을 벗고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는다. 그러나 미자의 침묵은 자기가 그 짐을 짊어지고 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따라서 장금의 침묵은 극적인 구원을 위해 준비된 또는 그 구원을 지연시키기 위한 서스펜스이지만, 미자의 침묵은 그러한 가능성을 원천 봉쇄시킨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 유사한 이 침묵이 차이를 빚는 결정적 이유는 바로 보호자의 유무에 있다. 장금에게는 민정호라는 듬직한 보호자가 있지만, 미자는 그러하지 못하다. 혼자서 찾아간 서울의 큰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은 야박하게도 이 점을 꼬집어 묻는다. 또한 미자에게 호감을 보이는 영감이 있다 싶더니, 몸도 성치 못한 양반이 약을 먹고 남자 구실을 하겠다고 덤벼든다. 냉정하게도 감독은 미자 곁에 누구도 붙여주지 않고 철저히 혼자서 감당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이렇게 암울한 상황에서 미자가 그렇게도 시를 써보겠다고, 그러나 시가 너무나도 써지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것은 그만큼 미자에게 침묵이 강요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어쩌면 미자가 애초에 쓰고 싶었던 시는 이 모든 억울함과 서글픔을 토로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전히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미자는 무엇을 써야 하는가를 고민했고, 결국 자기 손자로 인해 죽게 된 어린 생명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을 말을 대신하는 것을 선택했다. 미자는 희진에게 자기 시를 맡기는 대신 자신은 희진이 먼저 간 길을 따라간다. 미자는 침묵을 강요당하는 현실을 시로 승화시켰으나, 그 시는 결국 자신의 유서가 되고 말았다. 사랑이라는 말이 세 번이나 등장하는 이 유서는 가장 아름다운 것마저도 말할 수 없었던 미자의 심정을 대변한다.  

 

아녜스의 노래

                                       - 양미자

 

(미자가 낭송)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희진이 낭송)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서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2011/03/12 - [영화 리뷰] - 이창동,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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