客記
"an act of theater to be engaged" 본문
I can take any empty space and call it a bare stage. A man walks across this empty space whilst someone else is watching him, and this is all that is needed for an act of theatre to be engaged.
피터 브룩의 The Empty Space를 시작하는 저 유명한 문장에서 ‘to be engaged’란 말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인정투쟁; 예술가 편> 재공연 도입부를 보다가 문득 의문이 생겼다. 리뷰까지 썼던 초연을 보면서는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이 공연에서는 ‘시작하다’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바라본다면 그것으로 연극이 시작되기에 충분하다. (재공연의 정확한 워딩을 기억하지 못해 초연 문장을 인용함)
가장 최근에 나온 한국어 역도 이와 유사하다.
누군가 이 빈공간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다른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연극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민아 역, 2019)
다른 나라 번역도 더 찾아보았다. 피터 브룩이 오랫동안 활동했던 프랑스에서 나온 번역에서도 '시작하다'라는 의미의 단어(amorcer)가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que l'acte théâtral soit amorcé). 이처럼 '시작하다'는 여러 번역에서 자주 선택되는 역어다. 그러니 내가 그저 잘못 생각하는 것일 수 있고 이어지는 글은 그저 헛소리일 수도 있지만, 나로서는 이게 좀 마뜩하지 않다.
일단 사전에서 engage라는 동사가 시작하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용례를 찾을 수는 있다. 그런데 그건 ‘싸움을 시작하다’(Oxford), 혹은 ‘경쟁 또는 전투에 들어가다’(Merriam-Webster)의 의미일 때로 특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때는 싸움이나 경쟁의 '상대'인 사람을 목적어로 취한다 (to engage the enemy).
그래도 이 단어에 시작의 의미가 있으니 연극에 사용해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연극이 시작되기에 충분', 혹은 '이미 연극은 시작'이라는 표현은 이어지는 문맥과 잘 맞지 않고,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시작이란 말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극론에 사로잡혀 있어서일 수도 있으나, ‘시작’이란 말은 변화 혹은 발전 등이 이후로 전개될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여기서 저자는 다른 어떤 것, 저자의 예로 말하자면, 붉은색 막, 스포트라이트, 무운시, 웃음, 암전 따위가 이후에 이어지지 않아도, 빈 공간에 누군가가 걸어가고 그 모습을 다른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면 이미 연극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이후의 변화를 암시할 수 있는 ‘시작’이라는 말은 없는 게 나은 것 같다.
(<인정투쟁; 예술가 편>이 아리스토텔레스적 연극이란 말은 전혀 아니다. 비록 피터 브룩의 문장과 함께 배우들이 무대를 지나가는 단순한 행동에서 시작해서 점점 더 복잡하게 만들고, 그러면서 붉은색 커튼을 사용하기까지 한 건 피터 브룩의 말에 대한 오마주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오히려 이 연극은 고전적인 플롯과 인물화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의식적으로 반-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To be engaged”를 아예 옮기지 않은 독일어 번역은 그런 점에서 나름 이유 있는 생락이라고 할 수 있다: das ist alles, was zur Theaterhandlung notwendig ist. 그래도 저자가 사용한 단어를 살린다면 뭐라고 옮길 수 있을까? 동사 Engage가 사물을 목적어로 받거나 수동태로 사용될 때의 의미는 대체로 무언가가 사용되고 있다거나(The seat is engaged), 기계의 톱니바퀴가 맞물리게 한다(engage the clutch)와 같이 어떤 것이 긴밀히 작동하고 활성화되게 하는 의미에 가까워 보인다. 여전히 연극이라는 행위와 연결시키기 쉬운 뜻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단순한 상황이 (더 본격적인) 연극의 서두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도 연극이라고 부르기 충분하다는 의미를 담을 수 있어야 하겠다. YBM 사전에서 소개하고 있는 ‘...을 보증하다’라는 의미가 '무언가를 확실하게 하다'라는 의미로 이해 가능하다는 점에서 문맥에 근접하는 것 같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나는 이 단어를 ‘성립’이라는 말로 옮기고 싶다.
나는 여느 공터를 택하든 그것을 빈 무대라고 부를 수 있다. 한 남자가 이 빈 공간을 걸어 지나가는 동안 또 다른 사람이 그를 지켜본다. 이것은 어떤 연극 행위가 성립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