客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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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에서 사라진 무엇

스테레오 2017. 12. 21. 10:32

원주소: http://www.drama-in.kr/2017/12/you-know.html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원작 권여선

각색/연출 박해성 

출연 신사랑, 황은후, 노기용, 우정원, 신지우

2017.11.23-12.03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연극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는 동명 제목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 적절한 신체와 음성을 부여했다. 이 과정에서 원작 소설의 서술 방식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서스펜스는 아쉽게도 사라져야 했다. 권여선의 원작은 각 소절이 서로 다른 1인칭 화자에 의해 서술됨으로 인해 독자가 해당 소절을 읽을 때 이번에는 누가 서술자인지를 찾아야 하는 수수께끼가 주어진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독자에게 일정한 긴장감과 능동적 참여를 허락한다.


이 두 가지는 두 형식이 가진 특성을 서로 맞바꾼 것이니 얻은 만큼 잃었고, 잃은 만큼 얻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구성에 있어서 발생한 변화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무대 버전에서는 이야기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이야기 하나가 생략되어 있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공연을 보고 난 이후 소설을 통해 그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이 이야기의 전모를 가늠할 수 있었다.


물론 소설을 영화나 연극으로 각색할 경우 생략은 불가피하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천일야화’처럼 어떤 이야기가 길게 길게 지속되는 것을 지향하는 반면, 연극은 한두 시간, 길어도 서너 시간 안에 끝마칠 수 있도록 신속히 핵심 사건에 접근하고  신속히 결말에 도달해야 한다. 따라서 소설의 연극화는 기본적으로 압축을 전제하는 작업이므로 단순히 어떤 장면이 생략되는 것이 불만스러운 사람은 그냥 서재에 머무르는 것이 더 행복하리라. 


하지만 이번 각색에서 윤태림의 딸 실종 사건이 원작만큼 충분히 다뤄지지 않은 것은 소설 각색의 일상 다반사로 치부하고 넘어가기 어렵다. 이 문제가 작품의 제목 혹은 주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제목은 누가복음 23장에 기록된 예수의 말(“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에서 왔다. 작가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 해언의 동생 다언의 입을 빌어 이 말을 다시 쓴다. 아니 정말 알지 못하는 건 신 당신이라고. 인간들이 도무지 뜻모를 고통 속에서 죽고 사는데 어떻게 우리가 섭리를 믿을 수 있겠냐고. 오히려 이 모든 게 당신의 무지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다언과 상희의 대화 속에서 신의 섭리는 부정되는 반면 시에 대한 믿음은 재확인된다. 신은 믿을 수 없지만 시는 믿자는 그들의 대화는 연극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그런데 이러한 말들은 실종된 태림의 딸이 ‘혜은’이 되어 다언의 엄마 품에 있다는 이야기를 포함할 때와 하지 않을 때 매우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신의 무지를 선언하고 섭리를 부정하는 말이 다언의 입에서 나올 때, 독자나 관객은 그녀의 고통을 알기에 그 말에 공감할 수 있다. 심지어 그 말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겪은 고통에 대한 절규로 받아줄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자가 영아 납치 사건의 주범 혹은 공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의 반응은 같을 수 없다. 이럴 경우 다언과 그녀의 어머니가 벌인 일을 우리가 한편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더이상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으로 신의 섭리를 말하는 순간 우리의 도덕 감정은 선뜻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피해자가 신의 섭리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정의를 실현—그것이 정의 실현이든, 복수이든, 아니면 단순히 결핍에 대한 보상 심리이든—하게 함으로써 작가는 결정적으로 다언과 독자의 거리를 벌려 놓는다. 이 이야기가 단순히 신에 대한 원망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는 작가의 결정적 고안인 것이다.


그런데 박해성은 다언의 결정적 행동을 삭제함으로써 이 이야기가 가족을 잃는 불행 앞에서 한 인물이 신적 섭리를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하게 만들었다. 원작의 경우 정의에 대한 갈망, 섭리에 대한 회의, 그러면서 동시에 자의적 정의의 실현 또한 대안이 아님을 드러낸다. 하지만 각색은 결론에서 온전히 섭리에 대한 불신이 제시되고, 시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낭만적 전망을 내어 놓는다. 이 소설에서 섭리에 대한 고민이 영(Wm. Paul Young)의 <오두막>(The Shack)이나, 엔도 슈샤쿠(遠藤 周作)의 <침묵> 만큼 심화되지 않는 만큼 주인공이 섭리를 문제 삼는 것으로 끝맺는 각색은 결코 만족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기 어렵다.


이 작품에선 공교롭게도 신과 시가 서로 경쟁한다. 주인공은 신적 정의가 실현되지 않음을 고발하면서 그 대안을 시에서 찾는다. 하지만 시를 믿는 자들이 보여주는 행동 역시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여기에 작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신적 섭리에 일정부분 의구심을 드러내지만 섭리를 부정하고 신이 아닌 시를 믿는 자(들)의 행동 역시 대안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윤태림을 통해 신앙의 언어가 위선이 될 때 그것이 얼마나 역겨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만, 위선이란 신을 믿는 자 뿐만 아니라 시를 믿는 자들에게도 예외일 수 없음을 경고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 연극에서의 각색은 작가가 취하고자 했던 윤리적 긴장을 충분히 다루지 못했고, 그로인해 시를 우상의 위치에 놓는 결과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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