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客記
나는 띄어쓰기 따위는 좀 틀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시는 극단적 경우가 아니라면 '띄어쓰든' '띄어 쓰든' 뜻을 파악하는 데 크게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한 번, 두 번 같이 횟수를 나타내는 번을 띄워야 하는 게 여간 불편하지 않다. 이론적으론 알겠으나 내 머릿속에는 한이란 말과 번이란 말 사이에 어떤 공백을 부여한다는 게 늘 낯설기만 하다. 그러나 내로남불인지 아래와 같은 문장을 책에서 읽게 되면 종종 평정심을 잃는다. "여기 와본지가 꽤 오래되었거든요. 작년에 카나리아를 싸게 팔고 다니던 장사가 있었어요. 그때 한 마리 샀는 지는 모르겠어요." 의존 명사 지와 어미 -지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정확히 반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물론 뜻이 안 통하..
가 개봉한 지 3일 정도 지났고 이미 200만 명 넘게 이 영화를 보았다. 포털 영화 사이트 평점은 다시금 일반인과 전문가 사이에서 대립하고 있다. 대부분의 일반 관객들이 주저없이 자신이 줄 수 있는 최고 점수를 주고 있는 반면, 기자와 전문가들의 평점은 대체로 6점, 많아도 7점에 머물고 있다. 일반 관객들은 영화의 내용에 깊이 공감하면서 80년 5월의 광주의 실상이 다시금 영화화된 것을 반가워하고, 고마워하고, 미안해한다. 반면 전문가들은 내용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 내용을 다루는 방식이 너무 평범하고, 익숙하고, 심지어 안이했다고 지적한다. 맞다. 장훈이 놀란 만큼의 연출 역량이 되어 이 영화를 같은 수준으로 만들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하지만 80년 광주를 다루는 이야기의 평가 기준을 예..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indienbob.tistory.com/1033) 의 리뷰를 의뢰받았을 무렵, 한 외국인 연극학자와 만날 약속이 있었고, 그가 한국의 번역극이나 문화상호주의 연극을 보고 싶어 했기에 나는 이 공연을 같이 보자고 제안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불안했다. 아슬아슬하게 일정이 어긋나지만 않았어도 훨씬 더 유명하고 검증된 공연을 택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론 사계절 연극제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봄 공연을 놓친 것이 아쉽기도 했지만, 내가 관람하는 것과 누군가에게 추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다행히 공연은 내게도 손님에게도 흡족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게 물었다. 왜 햄릿이어야 하느냐고. ‘왜, 햄릿이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라고 대답하고 넘..
미야시타 나츠, , 이소담 역, 예담, 2016. 양과 강철의 숲이란 피아노에 대한 복합적 비유다. 일반인들에게 피아노를 소재로 접근하라 하면 대부분 나무가 먼저 떠오를 것이고 간혹 상아로 만든 건반을 생각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피아노의 구조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강철로 만든 피아노 현 정도는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양(羊)은 뭐란 말인가? 건반을 눌렀을 때 현을 때리는 망치(해머)가 펠트로 감싸져 있다는 데 답이 있다. 펠트는 울에서 왔고 울은 양에서 왔음을 알아야 비로소 양이 피아노와 연결된다. 그렇다. 양과 강철의 숲이란 적어도 현과 해머가 있는 어쿠스틱 피아노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는 사람과, 그 건반이 해머를 통해 현을 두드릴 때 올바른 소리를 내도록 하는 조율사에..
김재엽의 이번 베를린 기행에 공감하지 못했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그 보다 조금 일찍 같은 곳을 다녀온 나는 그저 연극에 등장하는 장소와 인물만으로도 볼 거리가 충분했지만, 그런 추억과 향수가없는 사람들은 아마 더 보편적이거나 극적이기를 기대했으리라. 생각은 자유에서도 나는 왜 조그만 일에만 분노하는가와 마찬가지로 극중 인물 김재엽은 극이 끝날 때까지 아무런 글을 쓰지 못한다.물론 쓰지 못한 그 글로 하는 연극을 본다는 아이러니도 여전하다. 하지만 남산에서 김재엽은 당시 상황에서 연극으로 뭐라도해보겠다는 절박함의 크기에 비해, 시인의 삶을 뒤쫓는 것 외에무엇을 해야할지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고 그래서 무기력했다. 반면 생각의 자유 속 김재엽은 보다 분명해지고 단단해졌다.그의 베를린 찬사는 그곳 연극에 대..
톰 크루즈가 드디어 스스로를 신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이썬 헌트로도 그는 죽지 않는 사나이, 불가능한 임무를 매번 해내는 수퍼 히어로였는데, 그걸로 모자랐나 보다. 아이에스가 메소포타미아 유적을 부수는 장면을 초반에배치한 건 서구가 한 일이 약탈이 아니라 야만인들로부터인류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거룩한 임무였다고 주장하는 듯 하지만, 헐리우드는 이번에도 이집트를 도구로 쓰고 버린다. 아마넷이 약속한 힘을 얻되 금발에 파란 눈의 제니를 선택한닉 모튼은 역시 오리엔탈리스트들의 후예 다운 도둑이다.
한동안 오디션은 전세계적 유행이었다. 대중들은 한편으로는 거대 기획사를 통해 어려서부터 노래와 춤 그리고 기타 개인기를 훈련받은 가수들을 즐기면서 동시에 시스템이 만든 게 아닌 타고난 천재가 나타나주기를 고대한다. 오디션 출신들은 닳고 닳은 아이돌들과는 달리 순수하며, 불우한 환경 때문에 지금껏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 그려질 때 더 환영 받는다. TV는 애* 뮤직, 멜* 등 쉬지않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서비스와 경쟁하기 위해 음악에 드라마를 끼워 판다. 물론 이 끼워팔기는 오래 전부터 뮤직 비디오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져 왔으나, 오디션에 담긴 드라마는 음악 자체가 아니라 음악을 전달하는 메신저를 향한다. 그들의 사연은 눈물 겨울수록 좋다. 비범한 재능을 지녔으나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주인공이..
제리 무어 지음, 김우영 역, 제2판, 한길사, 2016. 누군가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 사람의 주저를 읽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주저에 바로 뛰어드는 것은 어렵다. 내 경험상 심오한 사상가일수록 그런 시도는 무모했다. 물론 그건 그 책에 문제가 있기 보다 독자인 내가 준비가 되지 않아서였다. 어떤 분야는, 어쩌면 대부분은, 입문서조차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나는 해당 분야의 대표적 인물의 전기로부터 도움을 많이 얻는다. 어쩌면 수박 겉핥기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으나, 누군가를 얼마간 이해했다는 착각이 그의 사상에 더 깊이 들어갈 용기를 부여한다. 제리 무어의 은 이런 점에서 나에게 적합했다. 인류학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 밖에 없는 내게는 “인물로 읽는 인류학의 역사와 ..
스판덱스를 벗어버리니 비로소 배우들이 훨훨 날아 다닌다. 배역은 쇠락한 수퍼 히어로일지언정 배우들의 힘이 관객을 사로잡는다. 그간의 시리즈가 그들에게 얼마나 가혹하게 몸을 만들게 하면서 이미지만 소진시켰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패트릭 스튜어트가 자비에 박사로서 마지막 순간에서나마 가장 큰 울림 있는 대사를 남긴 것은 그를 위해서나 관객들을 위해서나 다행스런 일이다. 비록 슬레셔 장르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장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청불 등급으로 올라간 만큼 유치한 수준의 화해와 승리에서 자유로워진 것도 반갑다. 마블 영화를 보던 많은 소년 소녀들이 이제는 성인이 되었기에 그들을 위한 보다 진지하고 어둡고 슬픈 버전의 히어로 무비도 앞으로 심심찮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로건의 죽음은 복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