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客記
오래 전에 예매해 두었던 를 보았다. 아이슬랜드의 베스투르포트라는 극단의 작품인데, 이 팀은 몇년 전에 같은 곳에서 카프카의 을 원작으로 한 작품을 올려서 호응을 얻었던 바 있다. 제목에 들어 있는 아크로바틱은 괴테의 이 서재용 희곡을 극장으로 불러오기 위한 연출의 방편이었다. 주인공 요한은 젊은 시절 이름을 날린 배우였지만, 지금은 요양원에서 하루하루를 무료하게 보내고 있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가끔 자신을 알아봐 주지만, 오히려 그것이 현재 자신의 모습을 더 초라하게 만든다. 그나마 자신을 돌봐주고 자기 이야기에 귀기울여 주는 젊은 여간호사(그레타, 또는 그레첸)에게 연정을 느끼지만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처지가 슬프기만 하다. 젊은이들이 사랑을 찾아 요양원을 떠난 크리스마스 이브, 요한은 스스로 목숨..
지난 겨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본격적으로 논문을 써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낌과 동시에 마음에 부담이 점점 커져가던 때였다. 논문을 쓰기 위해선 먼저 지난 대학원 시절 동안 쓰고 모았던 자료들을 정리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이 또한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기를 피하는 고질적 증상이었지만, 아무튼 그 당시에는 일단, 좋은 USB 드라이버를 하나 장만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여러가지 외부 저장 장치 중에서 USB를 고르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외장 하드는 크고 무겁고 번거롭다: 적어도 그때부터 지금까지 쓰고 있는 내 외장하드는 그렇다. - 외장 SSD는 너무 비싸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 SD(XD) 등의 플래시 메모리는 별도의 리더기가 필요하기에 번거롭다. 이상과 같은 ..
0. 닥터 슬럼프 나는 샤워를 할 때 뭔가 중요한, 적어도 나 스스로는 중요하다고 여기는, 생각들이 떠오른다. 오늘도 가까스로 논자시를 보고 잠시 운동을 한 다음 샤워를 끝낼 쯤이었다. 공부를 하면서 겪는 어려움들을 기록으로 남겨 두면 나중에 다시 돌아볼 거리가 생기고, 혹시라도 같은 길을 걷는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그러면서 동시에 이걸 연재하면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스쳐 지나갔고, 그때 이미 "제목을 뭘로 정하지?"라는 한줄기 생각이 앞서 지나가기 시작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을 때 떠오른 제목이 바로 "닥터 슬럼프"이다. 어릴 적 동명 제목의 만화를 볼 당시만 해도 이 박사 참 비호감이다라고 생각했었다. 뭔가 어리숙하고 어리버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사 학위 하나 받아..
두 번의 국왕 살해로부터 태어난 하나의 비극: 의 출전에 관하여셰익스피어는 를 쓰면서 라파엘 홀린셰드의 책(Holinshed’s Chronicles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 1577[1587])을 참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의 큰 줄거리는 홀린셰드가 쓴 덩컨 왕과 맥베스 왕의 이야기와 동일하다.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덩컨 살해의 공범을 뱅코우가 아닌 맥베스 부인으로 만들고, 맥베스를 불면증에 시달리는 인물로 만든 것은 다른 이야기, 즉 도널드가 더프 왕을 죽인 사건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또한 사료에 따르면 맥베스가 왕위에 오른 후 뱅코우를 죽이기 전까지 약 10년이 경과하였으며, 그때까지 맥베스는 나름대로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
셰익스피어와 유령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작품에서 혼령, 요정, 마녀, 마술 등 초자연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혼령 또는 유령은 그 중에서도 가장 빈번하게, 또한 가장 극적으로 이용한 초자연적 요소이다. 예를 들어 와 , , 등에서는 환영(visions)의 형태로 유령이 나타나고, , , , , 에서는 죽은 사람의 영(spirits)이란 의미에서 혼령이 등장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빈번하게 사용된 혼령은 당시의 신앙과 문학적 전통이 만나서 이루어진 것이다. 16-7세기 영국은 마술에 대한 믿음이 가장 크게 번성하던 시기였으며, 마술과 유령에 대한 견해 또한 다양했다. 먼저 스콧(Reginald Scot)과 같은 사람은 《마술의 발견(The Discoverie of Wichcraft)》이라는 책..
지난번 "적도 아래의 맥베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재일교포들의 이야기 앞에서 나는 다소간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아마도 나의 삐딱한 성품이 그 첫번째 이유이겠으나, 굳이 이유를 대자면 이야기의 소재가 공연을 보기도 전에 나에게 "연민"을 강요하고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선입견을 흔들어줄 뭔가 '쿨한' 이야기를 내심 기대하는데 막상 그러한 작품은 만나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선뜻 말하지도 못한다. 분명 찜찜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이야기가 과연 미학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라든지, '이처럼 심각하고 또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가볍게 다룰 수는 없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난 번에는 "단조롭고 지루하다"라든지,..
촌부의 명랑한 노래 한 곡조가 베토벤의 소나타보다 더 훌륭한 예술이라 주장하는 톨스토이의 민중지향적 감염 예술론, 톨스토이는 예술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노력[노동]과 생명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 상호간의 애정까지 파괴하면서도, 그 본질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예술론을 시작한다(제1장). 그렇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는 활동이 과연 진정한 예술이고, 이것은 그만한 희생을 강요해도 좋은 만큼 중요한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먼저 다음과 같이 묻는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좋은 예술이란 무엇인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일반적 대답은 예술은 미를 산출하는 것이다라는 것으로(제2장),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미란 무엇인가 하는..
"Jessica Dickey is giving such an extraordinary performance. The play is also a remarkable piece of writing." — New York Times - To read the full review in the New York Times please click here "Dickey does a terrific acting job under helmer Sarah Cameron Sunde..." — Variety "The Amish Project is thought-provoking, compelling theatre..." — nytheatre.com "(Dickey's) craft made me weep. The virtuos..
2007.06.12 배우 전도연 씨가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아침에 확인하였다. 그녀의 연기력이나 특히 발음(diction)에 있어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으나, 이번 수상을 통해 국제적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것이니 축하할만한 일이다. 아무튼 그녀의 수상으로 인해 이창동 감독의 복귀작 이 세간의 관심을 더욱 받게 되었다. 물론 일부 관객은 영화관을 빠져나오면서 '캐리비안의 해적'이나 볼걸 하는 후회를 표현하기도 했다. 전도연의 수상은 온 국민이 어깨를 으쓱할 법한 일이긴 하지만 그녀가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이 영화가 그녀에게 부여한 무게감이 크기 때문인 것 같다. 관객의 입장에선 시종일관 무겁고 칙칙하며 애매하게 끝나는 이 영화가 평일 밤에 즐길만한 오락거리는 분명 못되는..
1. 국립극단 국립극단이 를 선보이고 한 달여가 지났다. 작품에 대한 찬사가 주도적인 가운데 비판적인 목소리도 적지 않다. 잘 봤다는 사람들의 경우 희랍 비극의 대표작을 화려한 무대와 이름 있는 배우들의 연기로 구경할 수 있었다는 경험 자체에 만족하는 것 같다. 반면 불만족스러웠던 사람들은 소문난 잔치에서 마땅히 먹을 것을 찾지 못한 욕구 불만을 토로한다. 나는 이 양 갈래의 반응 중 후자에 가까우며, 이번 공연의 문제가 작품을 풀어가는 방향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관객들이 불신을 중지하고 텍스트가 가진 힘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원작에 대한 각색에서부터 무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배우의 연기 전반에서 감지된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원작이 다루..